2월 19일 연중 제 7 주일: 원수를 사랑하여라
주일 미사 참례를 못 한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오늘 신부님의 강론 내용이 뭐야?” 남편은 묵묵히 아내에게 다가가 그녀를 힘껏 안아 주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남편의 포옹에 감격한 아내는 다음날 아침 미사가 끝난 후 본당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어제 강론 말씀이 너무 좋았나 봅니다. 저희 남편이 변했어요.
무슨 내용이었나요?” 그러자 신부가 대답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사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도 있다. 정말 사랑은 대단하다. 사랑은 사랑하면 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도 한다. 이처럼 사랑에 관한 말을 적자면 하루 종일 써도 모자를 지경이 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되며 결국에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순시기를 앞둔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마태 5-7) 절정에 달한다. 복음은 두 단락으로 이뤄지는데 주제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마태오의 공동체는 대부분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척도는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나는 율법을 잘 지켰는가, 아니면 규칙을 어기지는 않았는가? 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주의를 넘어 그리스도인의 특성인 참된 사랑을 실천하라고 초대하신다.
예수님은 먼저 고대의 동태 복수법에서 출발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끝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삶의 방향으로 제시하신다. 폭력을 포기한 것은 예수님이 수난에서 보여 주신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태도는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놀라운 교육이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지점에 이르는 첫 단계는 폭력에 폭력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고대인들 안에서 동태 복수법은 폭력을 완화시키는 방편 중에 하나였지만, 인간의 영혼과 나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악을 근본적으로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모욕에 아예 응답하지 않음으로 악의 탄생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하신다. 이어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치신다. 이웃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 가족, 친구, 동료, 동족…. 결국 이웃은 한 마디로 나의 사람들이다. 원수 같은 남편, 혹은 원수 놈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가 종종 있다.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을 당했을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원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성경을 살펴보아도 아담에게는 하와가 원수였고, 아벨에게는 형 카인이 원수였다. 야곱의 원수는 그의 형 에사오였고, 요셉을 팔아 넘긴 형들이 요셉의 원수였던 것처럼 예수님을 팔아 넘긴 제자 유다스가 그분의 원수였다. 사랑해야 할 원수라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가족과 이웃 이기에 상처가 더 크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원수를 대하는 모습에는 5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원수에 대해 칼을 품고 복수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대부분 원수가 망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망한다. 둘째, 직접 복수하지 않더라도 원수의 멸망을 이제나저제나 손꼽아 기다리는 단계다. 하지만 자기 마음만 불편한 상태가 되어 일도 잘 안 되나 오히려 원수는 더 잘 될 때가 많아 더 속상하다. 셋째, 편한 마음으로 원수의 종말을 지켜보는 단계다. 이것은 원수가 정말 나쁜 일을 했다면 반드시 망할 테니 사필귀정을 믿고 편하게 지켜보자는 것이다. 네 번째로 원수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잊어버리는 단계다. 자기 할 일만을 생각하고 원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다. 사실 원수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것은 원수를 잊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섯째,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원수를 축복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어렵다. 그러나 원수가 가까이 있다면 한번 해볼 만한 일이지 않겠나 싶다. 원수를 미워함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해 자신의 영혼까지 파탄 나게 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 기도해하고 또 더 열심히 그들 받아 줌으로 자신의 평화를 얻으라는 것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원수에게 받은 손해와 상처는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곧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나는 늘 손해만 보고, 부당한 일을 당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 12,19)”라 했다. 복수는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는 더 큰 사랑을 위하여 원수에게 잘해주고 축복해주면 복수의 쾌감이 아닌 영혼의 행복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또한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맡기면 모든 일을 가장 선하고 적절하게 처리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저 원수에게 잘 대해주고, 축복하고, 기도해 주는 것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 뿐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마땅히 원수를 사랑하고 잘 대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게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