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연중 제 30 주일
ME 지도 신부인 내게 사람들이 툭하면 던지는 질문이 “저 사람들 부부 문제가 많아 엄청 싸워요. ME보내면 좋을 것 같아요.” 혹은, “우리는 부부끼리 문제가 없어 싸우지도 않아요.” 싸우는 것이 과연 잘못일까? 아니면 문제가 없는 것이 잘된 일일까? 많은 이들은 이혼하는 부부들의 원인을 ‘성격 차이, 경제적 문제, 가족들과의 갈등, 배우자의 외도, 폭력, 술, 도박 등의 문제’로 보지만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도 아니다. 많은 부부를 만나며 알 수 있었던 진짜 이혼 사유는 싸움의 내용’이 아니라 싸움의 방식에 있다. 갈라서는 부부들의 대화 내용을 들여다보면 싸움의 기술이 화려하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 “너나 잘하세요. 주제 파악 좀 하지?”명치만 골라 때리는 팩트 폭격에, 상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며 멀어지는 대화는 서로를 견디지 못하게 한다. 반면, 이혼 사유가 백 가지는 족히 넘어 보이는데도 깨가 쏟아지게 잘 사는 부부들도 있는데, 이들의 비밀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화에 ‘관심, 공감, 배려, 경청’이라는 안전장치를 절대 풀지 않는다. 결국 주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사랑’이라는 필터를 끄지 않는 한, 남들이 부러워하는 수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랑의 핵심은 간단하다. ‘너 나한테 뭐 해줄 건데?’가 아니라, ‘저 사람이 지금 진짜 원하는 게 뭘까?’를 먼저 스캔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비단 부부 관계뿐일까? 부모 자식 사이든, 이웃과의 관계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먼저 바라 볼 때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람의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제1독서(탈출기 22장)를 보면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당시 사회에서 이방인, 고아, 과부는 그야말로 흙수저 중의 흙수저들이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도 옛날에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며 서러운 밥 먹어봤지?”라며 과거를 상기시키시며 명확한 경고를 날리신다. “너희가 이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한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 줄 것이다.”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서 약자를 배려하면 좋겠지만, 주님은 인간의 얇은 우정과 간사함을 이미 알고 계시기에 약자를 건드리면 내가 직접 나서시겠다며 강력한 경고를 날리시는 것이다. 힘없는 이들 편에 서신다는 이 말씀이야말로, 사랑과 자비가 주님의 본정체성을 보여주는 결정적 대목이다.
제2독서(테살로니카 1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신앙이 전파되는 신기한 ‘릴레이 시스템’을 소개한다. 테살로니카 사람들은 환난 속에서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사도들을 주님의 대리자로 믿고 본받음 하더니, 급기야 본인들이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 모든 신자들의 본보기가 된다. 신앙과 사랑의 전달 방식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대단한 사람들 (Superhero)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부족해 보이는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을 통해 건네진다. 전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이라는 그릇에 실려 이웃에게 전달되고,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또 다른 ‘작은 그리스도’로 변신한다. 사랑이라는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감염되고 전파되는 거룩한 신비인 셈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 두 계명으로 초대된 우리는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지닌다. 주님 향한 우리의 뜨겁고 열렬한 사랑은 먼저 주님 곁에 머무르는 기도를 통해,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웃들에게 내미는 사랑의 손길을 통해 표현 된다. 다시 말해 주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은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로 충전되고, 우리 삶에 배치된 이웃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무도 모르게 한 소소한 선행이라도 누군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엄청난 영감이 된다. “나도 저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릴레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신앙도 수천 년 동안 이 릴레이 경주를 포기하지 않고 뛰어준 선배 신앙인들 덕분이다.
흔히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율법 교사들처럼 내 신앙이 타성에 젖어 형식적인 종교 루틴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자주 되돌아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믿음이 우뚝 솟아 있더라도, 그 위에 ‘사랑’이 없으면 딱딱하고 완고한 율법주의자로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꼴 보기 싫은 면까지 포함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려고 애쓰는 우리는 이미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일부러 폼 잡으며 “나를 본받으라!”고 광고하지 않아도 괜찮다. 주님의 계명을 품고 하루하루 버티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얼굴을 닮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내 모습에서 누군가 작은 위로를 얻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릴레이가 된다. 우리가 오늘 하루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