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0일 성김대건 안드레아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신부님강론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을 한국 순교자를 기리며 우리 시카고 한국 순교자 성당의 본당의 날이다. 미국의 거의 모든 성당의 주보성인들은 한국 순교자 중의 한 분이거나 한국 순교자 모두를 주보성인으로 정한다. 미국의 거의 모든 한인 성당들이 아마 오늘 본당의 날로 정하고 축하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오늘은 시카고 지역 아시안 미사를 추기경님이 집전하시는 날이다. 하지만, 시카고 내 한인 본당들은 본당의 날 행사 관계로 참석하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아주 명확하고도 묵직한 가르침을 던지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하신다. 마태오 복음이나 마르코 복음에는 없는데, 루카 복음에만 있는 단어 가 있다. ‘날마다’란 단어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거창하게 마음 한 번 고쳐먹고 끝나는 ‘일회성 이벤트’가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목에 예쁘게 걸고 다니는 금목걸이 액세서리 같은 게 아니며, 마음에 안 들면 며칠 놀다 팽개쳐버리는 취미 생활이나 오락도 아니다. 십자가는 ‘매일매일 갱신해야 하는 삶의 출근도장’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의 가장 약하고 못난 성격일 수도 있고, 피하고 싶지만 평생 짊어져야 하는 환경이나 질병일 수도 있다. 또는 도저히 마음이 안 맞는 이웃이나 직장 동료일 수도 있다. 낯선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과 동행하며, ‘오늘 딱 하루만 더 참아보자’ 하고 비장하게 다짐하는 그 매일의 순간들이 바로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이다.

 

“에휴, 안 그래도 삶이 피곤한데 매일 십자가까지 짊어지라니 너무 하신 거 아닌가 하고 볼멘소리가 튀어나오지만,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준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37) 십자가는 결코 나 혼자 외롭게 끙끙대며 짊어지는 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지셨던 그 십자가에는 이미 예수님 자신이 못 박혀 계신다. 즉, 내가 내 몫의 십자가를 껴안는 순간,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 계신 예수님을 동시에 껴안게 되는 셈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십자가 + 예수님 + 나]라는 환상의 3인조 조합이 결성되는데, 세상에 넘어서지 못할 시련이 있을까?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3장)를 보면, 주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고통받고 시련을 겪은 의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 사람들의 얄팍한 잣대로 보면 그들은 “쯧쯧, 불쌍하게 파멸했네, 징벌을 받았네” 하고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하느님의 눈은 다르다. 고난 속에서 부단히 쌓아 올린 ‘신뢰’와 ‘믿음’이 습관이 되고 덕이 된 이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불사의 희망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지혜서는 역설한다.

 

오늘은 오직 주님을 향한 열정 하나로 목숨을 바쳤던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면 박해 시대처럼 목이 칼에 베이거나 감옥에 갇히는 피 흘림의 순교를 떠올린다. 하지만 라틴어로 순교를 뜻하는 단어 martyrium의 원래 뜻은 ‘증거(testimony)’다. 즉, 내 말과 생각과 행위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세상에 보여주는 모든 삶이 바로 순교라는 말씀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 칼날 아래 목을 내밀 일은 없다. 그래서 오늘날의 진짜 박해자는 외부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솟구치는 화를 주님 생각하며 한 번 꾹 참아주는 것! 나에게 상처 주고 속 뒤집어놓는 사람을 억지로라도 용서해 보려고 기도하는 것! 나태함과 이기심을 누르고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 안의 고집스러운 자아를 십자가에 박아두는 현대의 ‘영적 순교’일 것이다.

 

우리의 순교 조상들이 죽음 앞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이 슈퍼맨이라서가 아니다. ‘날마다’ 쌓아 올린 작은 인내와 헌신이 삶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 거룩한 ‘덕’으로 피어났기 때문이다. 평생 십자가를 지고 갈 생각에 벌써부터 어깨가 뻐근하신가? 너무 멀리 보지 말고 “오늘 딱 하루만 주님 생각해서 참아보자! 오늘 하루만 내 십자가를 웃으며 안아보자!” 이렇게 매일의 다짐을 새로 갱신해 살아간다면, 어느새 우리 삶도 순교자들처럼 온통 주님의 향기로 물들고,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 안에 머물게 될 것이다. 본당의 날인 오늘 한국 순교자의 정신을 다잡는 우리였으면 한다. 해서 순교자의 후예답게 우리 어깨에 놓인 십자가 속에 계신 예수님을 안고 가는 우리였으면 한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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