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도 기회가 있었을 때, 입으로도 또 글을 통해서도 몇 차례나 말 했었던 적이 있는
정말이지 나 자신도 보기싫어 뒷마당 어디 눈에 띄지않을 돌밑에 파묻고 싶을만큼 창피스럽고 또
부끄러운 나의 지난날 체험담을 여기 다시 끄집어내려는 목적은 단 한가지.
혹시 이글을 읽게되는 이가 그의 삶 가운데,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뜻하지 않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
힘들고 고통을 겪고 있다면, 이글을 통하여 나처럼 또 다른이의 체험을 만나보고 아주 작은 위안이라도
얻을수 있었으면 그래서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안에 평화가 차고 하느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다면 보람된 일이고 얼마나 함께 기쁜일이 될까 해서이다.
어떤이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보다는 창피하더라도 자신의 것은 더 확실한 증언일수 있을 것이다. )
그림에 있는 이길은,
언덕진 길인데 주중의 아침이면 매일 넘어가고 저녁에는 다시 넘어오며 다니기를 저렇게 계절따라 그 모습이
변해가기를 수십번을 반복하였던 언덕이라 모르는 사이, 정도 들었고 이젠 이사를 해서 그렇게 넘어다닐 일이
없어도 어쩌다 그리 지나가야할 지경이면 지금도 가슴이 뛸만큼 고통을 되살려주는 언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언덕은 내 인생의 여정에서 황금기였어야 할 청장년의 삶을 숯덩이처럼 굽고 태워서 사그리
앗아간 길이기도 하다.
참으로 회한이 깃들어 엇갈리는 언덕이었다.
한 번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도무지 웬일인지 알수 없는 경험을 하게되었다.
아침에 일을 하러 언덕을 넘고있었는데 맑은 하늘에는 많은 까마귀새들이 공중을 날며 땅에 있을 먹이를
찾는지 휘휘 돌고 있었다.
늘 자주 보는 광경이긴 해도 그래도 나는 차창을 통하여 그 새들을 올려다보며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먹이를 찾아낸 새의 동작처럼 쏜살처럼 땅을 향해 돌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머뭇거림도 없이 내다보고 있는 내 얼굴 정면의 차창에 있는 힘을 다 하여 부닥뜨리고는 내 차옆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이것은 공중을 나는 새들의 생리상 믿기 어려운 현상일 것이다.
보통 먹이를 발견한 새는 근처에 사람이나 차가 있으면 빙빙 돌며 기회를 보다가 서서이 주의를 살피며
접근하게 마련인데 그 많은 새중 어떻게 한마리가 꼭 의도한듯이 정면으로 전속력으로 내려와 내얼굴에
부닥뜨려 죽을까. 그 때 차유리가 없었으면 분명히 내얼굴은 크게 상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연히 일어난 사고이겠지만 지금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의문을 준다.
나는 아마도 지금 저기 하얀눈이 덮히고 나뭇닢을 다 떨구고 서있는 저 앙상한 나무로서의 모습이되어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나는 거기 하나 남은 저 초록의 잎새가 되어 매서운 북풍과 비바람이 몰아쳐도 절대로 나무의 몸통을 놓지지 않고 매달려 나무가 나를 내치지 않는 한 함께 있을 결심으로 있다.
그 잎은 나의 희망이며 나는 희망을 결코 놓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희한한 일을 만나고 겪고있다.
내 인생의 청년기였던 저 여름과 가을을 살아가고 있었을 때는, 24 시간을 저 겨울의 모습 보다도 더 삭막하고
춥고 꽁공 얼어 고통을 안고 지내 왔었는데,
막상 이제는 인생의 겨울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지금, 나의 마음과 영은 저 따스한 봄날처럼 차분하고
가라앉아 평화를 맛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예상치도 못했던 아이로니이며 경이로움일까.
개나리, 진달래 핀 저 꽃밭에 도시락 싸서 나들이라도 갈 채비라면 좀 비약일테지만.
기억속에서 말끔이 치워졌으면 싶게,
저 언덕을 넘나들 때, 나는 너무나 벅차고 아픈 마음을 안고 사느라 그때에 늘 주님께 바라는 소망과 기도는
이길을 가고오지 않아도 되도록 이몸을 거두어주소서 그런 송구스런 떼를 쓰는 것이 일과였다.
주님은 그런 못된 소망을 못들은 체 하셨다.
이제서야 깨닫게된 일이지만, 나의 주님은 이 못나고 창피한 죄인마저 사랑하셔서
그 고통을 피하거나 저항하지말고 인내로 주님의 지혜를 구하여 이겨내고 지금 맛보는 이 마음의 평화를
심어주시려는 계획이셨다고 믿어진다.
어찌 주님께 감사,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수 있겠는가.
나의 어머니는 늘 일러주시곤 했었다.
사내는 태어날 때 울고 그리고는 좀체로 눈물을 흘리는 법이 아니라 하셨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나는 어머니의 명을 거역하고 흘린 눈물을 다 모았다면 아마도 김치병 하나도 채웠을지 모른다.
어머니가 보셨으면 넌 내 아들도 아니고 사내도 아니다고 큰 호통을 하셨을 것이다.
막상 그렇게 호통을 치셨어도 가슴으론 속 상하셔서 대신 우셨을지 모른다.
언덕을 넘어가며 울고, 넘어오며 울고,
주일미사에 가며 울고 집으로 오는 길에 울었던 것같다.
운전하며 울고 화장실에 숨어 울고 이불 뒤집어 쓰고 울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울었다.
그런데,
지나와서 되돌아보면 모든 그 악몽의 원인제공자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손가락 꼽아가며 따지잔다면, ” 너 때문이야, ” , ” 너 때문이였어. ” 그럴수가 있더라 한대도
궁극적으로 손가락질은 자신을 향해서 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정말 주님앞에 신실하고 신앙의 본이었다면
나의 신앙을 배교하라는 강압성의 요청은 할수 없었을 게 아니겠는가 ?
모두, ” 내탓이고 내탓이며 내탓이었다. ” 고 고백해야 하겠다.
아마도 나는 그간의 삶의 여정에서,
저 언덕마루턱에 있는 신호등을 만났을 때 빨간불에는 가려하고 파란불에서는 머뭇거리며
허둥대는 모자라고 초라한 행색으로 두리번 거리고 허우적거리고 그랬을 것이다.
훌훌 털고나니 마치 홍해를 건너온 백성이 된듯 자유롭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주님의 은총은 참으로 신비하고 놀랍고 오묘하시다.
그렇게 견딜수 없던 것도 여기 이만큼 건너와서 보니 다 견딜만한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견딜수 없을 시련은 허락하시지 않을실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 다달을 주님의 은총을 만나게 해 주신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돠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 야고1:2)
며 우리에게 일러주지 않는가.
고통은 축복에 이르는 길이다. ( 평화) 보다 더 큰 축복도 있겠는가 ?
지혜의 사람, 솔로몬이 부왕, 다윗을 위해서 반지를 만드는 세공인에게 반지에 새기게 하였었다는 문구,
” This, too , shall pass. ” ( 기쁜 일도, 또 슬픈 일도 다 지나가고 우리를 떠나가리라. 는 뜻으로 다윗왕이 항상
가슴에 새기는 금언으로 삼았었다고 전해지는 명구. )
살아가는 동안에,
기쁜일을 만났다고 너무 기뻐만 할 것도 또, 슬퍼도 너무 그에 빠져 절망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푸싀킨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슬픔이 지나가면 기뻐할 날이 오리니.
기쁨도, 슬픔도 나에게 찾아오는 것을 만나면 피하지도 저항하지도 말며 슬기롭게 넘기고 지나보낸다면
주님은 나를 평화와 합하게 해 주실 것이라 믿어진다.
다만,
불의와 손잡지 말고 악의 유혹을 물리치며 마음을 바로하여 깨어 기다린다면 그리될 것이다.
어떤이는 심지가 약해져서 알콜이나 다른 나쁜 약품에 의존하며 피해가려 하겠지만
그것은 타락이고 파멸의 길일뿐 결코 나의 피난처가 아니다.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이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LET IT BE ( Beatles 비틀즈의 노랫말중에서 )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s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
”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론 그대가 아플때도
약속한대로 그대곁에 남아서 끝까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위급한 순간에 내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의 위안이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끝에서 보면 알아요….. ” ( 위대한 약속의 노랫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