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집을 떠난다는 의미의 이 말은 불가의 스님들의 출가를 연상 시킵니다.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모두 안 되니까, ‘에이 머리나 깎고 절로 가야지’ 하는 생각이
나 ‘저 사람은 여자 혹은 남자한테 실연을 받아서 혼자 산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해서 누가 내게 지나가는 말로 "왜 수도원에 들어왔냐"고 물어오면 간단히
"팔자 소관"이라고 답 합니다. 이와는 달리 성서에서 말하는 출가의 의미는 다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말씀 즉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세상 즉, 세속에 깊이
들어오셨다는 의미이니 출가는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들어온다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시몬과 그 일행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이야기 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러 좀 더 깊은 곳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깊은 곳에서 사람을 낚아야' 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뜻은 '하늘나라의 선포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즉 하늘나라의 선포는 세상에서 출가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로 들어와 사는 이들의 몫으로 거기에서 그분을 보여주고, 그분의 말씀을 살
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의 기도가 눈에 보이는 이익에만 치중해 하느님께 '주시옵기만을 바라는' 기도만 하고 있다
면, 신앙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가 주일에 성당에 나오는 것이 고백성사를 피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친구들이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
면 우리의 신앙은 그저 알맹이 없는 예식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것 즉, 친구를 만나거나 사람들을 만나서 친교를 이루는 것은 교회와 우리 신앙생활에 활
력을 넣어주는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단인 치
유나 기적에 집중하고 있었지 복음 선포의 목적인 하느님 나라에는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소원만을 아뢰고 알맹이 없는 예식에만 참여하
는 것으로 만족 한다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마음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겠습니까?
가끔씩, 어떤 분들은 내게 이렇게 물어옵니다. 종교의 자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는데 왜 유독 가톨릭에서는 애들에게 유아 세례를 줘 버림으로서 그들 스스
로 선택할 기회를 뺏는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참 답답합니다. 속으로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왜 애들한테 물어 보지도 않고 학교에 보내는지, 왜 애들이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죽어라 시키는지” 부모가 자녀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교육시키는 것은 그것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
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산다면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 신앙을 물려 줄 것입
니다. 좀 더 나아가 복음을 살아가며 얻는 기쁨은 우리를 복음의 선포자로 만듭니다. 이리 좋은 삶을 어찌 이웃들과 나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말이 쉽지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것 또 복음을 우리의 생활로 선포한다는 것은 녹록치 않습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 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도록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
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불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애쓰며" 하느님의 은총이 넘치도록 해야 합
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점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명의 삶이란 칠삭둥이 같은 모자란 사람임에도 불러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해
하며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그물을 치겠습니다.’는 베드로의 순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직업은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전문가의 지식과
체험으로 고기를 잡으려 할 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것을 버린 채 그물을 치니 무섭도록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그렇습니다. 설사 우리가 애
를 쓰고 별별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별 성과가 없거나 결과가 안 보일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그분의 말씀에 항구해야 합니다. 해서 우리가들은 오늘 말씀은 복음
선포라는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교회가 우리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시다."하면 대답은 같습니다. "뭘 알아야 전할 것 아니냐"는 말인데, 겸손하게 들
릴 수도 있는 이 대답은 복음 선포의 의미를 혼동한 것입니다. 복음은 '배우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생활이 복음 선포가 되도록 해야 합니
다. 복음은 성서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살아가는 것이 복음 선포지 말씀을 앵무새처럼 남에게 전하는 것이 복음 선포가 아닙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사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더럽고 그분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기에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 다. 옳은 생각이고 맞는 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기에 부족하고 합당치 못합니다. 그러나 천
사가 타는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댐으로 합당한 사람이 되었듯 뜨거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모실 수 있게 되었으며 살아
갈 힘까지 얻습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 출가는 집을 떠난다는 의미이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떠난 다는 것은 우리의 안락함 (Comfortable Zone)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해서 사람 낚는 어부는 세상을 등지고 기도만 하는 수도승의 삶만이 아니라 세속에 깊이 들어와 그곳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이기도 합
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 오." (이사야 6,8)
교회는 매 미사 때마다 이렇게 신자들을 파견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으
면 우리는 이미 '세상 깊숙한 곳'에 그 물을 내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임을 자처하는 것 아닐까요?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