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지난 수요일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고 거룩한 사순시기를 시작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기 2,7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지 같은 존재입니다.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흙먼지 같음은 우리 자신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초라한 흙먼지에 하느님의 생명의 숨결이 부어졌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흙먼지와 같은 존재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고 하느님을 담아낸 존재로 창조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땅인 우리 각 사람에게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열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창세기 2,9

 

하느님께서는 같은 흙에서 그것도 동산 한가운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습니다. 어떤 이가 제게 묻습니다. "도대체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흙으로 만든 동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나게 하셨고, 우리 또한 흙에서 왔음을 기억한다면, 에덴동산은 정확한 지명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중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는 동산 가운데에 즉, 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동산의 모든 열매는 다 먹어도 되는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절대 먹지 못하게 하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좋은 것일진대, 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선과 악을 아는 과일을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바로 원죄의 출발은 과일 하나를 따먹은 가벼운 잘못이 아니라 내가 알게 된 고집하는 선이 세상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도대체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입니까? 선과 악은 하나가 아닐까요? 선이 자리를 잘못 잡았을 때 그 선은 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김칫국물은 깨끗하고 맛있습니다. 깨끗하지 않으면 우리가 먹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이 깨끗하고 맛있는 김칫국물이 하얀 옷에 묻으면 필요 없는 악이 됩니다. 잉크가 펜 끝에 묻으면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지만, 잉크가 옷에 묻으면 지워 없애야 할 악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수의 선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악들이 선을 이겨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힙니까? 선과 악의 싸움은 정의롭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고집된 선에서라면 불목과 반대가 무성하게 되고 진실은 덮여집니다. 지금 한국에서 낮에는 태극기가 넘쳐나고 밤에는 촛불로 넘쳐나는 기이한 현상 안에서 누구의 선이 더 많은지 따지는 형국이 되었고, 국민의 80과 20, 혹은 70과 30의 숫자에서도 어떻게 해서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에 억지스런 고집으로 법을 농단하고 우롱하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과연 그들의 선은 무엇입니까? 태극기를 든 이들도 나름 그럴듯한 이유가 있고, 촛불을 든 사람들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겠지만, 오히려 진실은 가려진채 이념과 숫자 싸움으로 이리 갈라지고 소리치는 현실은 분명 선과 악의 갈림이고 에덴동산 가운데에 있는 선악과의 또 다른 모습이 분명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신명기 11, 26

이보다 명확한 말씀을 성서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에덴동산 가운데 서 있는) 선과 악을 보면서 축복과 저주는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거나 저주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들을 흙에서 자라게 하셨지만 원죄의 뿌리, 선과 악을 알아냄으로 아담과 이브, (최조의 부부)가 갈라지고, 카인과 아벨, (최초의 형제)가 갈라졌으며, 선과 악이라는 흑백의 논리로 갈라져 서로가 서로에게 악이라 부르짖는 세상에까지 와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일반적으로 너른 벌판을 가리키는 광야는 구약의 백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장소였습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구리 뱀을 통하여 은총을 베푸셨기에 광야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시기에는, 광야가 내림할 메시아를 고대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사용됩니다. 현대의 광야는 우리가 머무는 세상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고, 광야에 들어 높여진 구리 뱀처럼 높이 들려진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게 드러나는 곳이 이 세상이니 말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선택해 살아야 할 축복과 저주, 선과 악으로 갈린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몫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를 지내며 유혹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일이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듯 우리 가운데 늘 존재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이 광야에서 마음에 재를 얹고 살아야 할 몫을 찾아야 합니다. 흑과 백의 논리로 서로에게 악이라 소리치는 현실에서 우리게 울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파스카의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설정된 40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사순절이 되면 신자들은 이미 받은 세례를 다시 생각하고 참회행위를 통해서 빠스카의 신비체험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무엇입니까? 머리에 물을 부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마태 3,15) 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40일의 여정이 끝나고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온 마음으로 감동의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도록 선과 악의 논리에서 벗어날 회개는 무엇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태 3,8)는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나타낼 단식은 어떻게 실천할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희생하고, 단식하며 고통을 즐기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나타나는 부활에 희망을 둔 사람들입니다. 흑백의 논리에서 벗어나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은 회개해야 가능하고, 회개의 표시로 단식과 자기 버림을 실천함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활을 향한 이 거룩한 여정에 동참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에 있으니, 유혹을 넘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만을 바라봅시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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