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다윗의 후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성지주일은 부활절 바로 전의 주일로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지는 보통 종려나무나 올리브나무의 가지로 승리를 상징합니다. 또한 최후 심판을 묘사함에 있어서 최후 승리를 상징합니다. (묵시 7: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와 존경의 표시로 겉옷을 길 위에 깔고 성지를 흔들며 예수를 환영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요한 12:12-14, 마르 11:8, 마태 21:8) 이 날 축성된 성지는 1년 동안 잘 보관하였다가 다음 해에 태워서 재의 수요일 이마에 재를 바르는 예식에 사용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하느님께 봉헌되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삶으로 초대되었습니다. 해서 우리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이마에 재를 얹고 회개하라는 교회의 권고에 따라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순례에 동참했습니다. 회개는 고백성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일으켜세워 편함에 길들여 있던 자신을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에 반대되는 내 생각, 내 습관, 내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이 참회의 행태로 나타나야 한다고 이번 사순시기 동안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회개가 필요한 이 때, 예수님의 수난이 좀 더 가까이 보이는 이 거룩한 때에 우리의 회개의 삶이 무엇인지 더 집중하기위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까이 그리고 자주 뵈오며 내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화가 나면 쉽게 하는 말이 '죽여 버린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욕입니까? 그러나 실상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힘이 들면 하는 말이 '죽겠다, 죽을 것 같다'며 푸념하지만,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을 뜻하기에 이를 진정으로 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의 죽음도 슬퍼합니다. 시리아에서 화학무기로 많은 어린이와 약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뉴스 (목요일)에서 쌍둥이를 잃은 아버지의 눈물이 방송 되었습니다. 그 쌍둥이 아빠는 이번 테러로 아내는 물론 가족 중 45여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 눈물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달린 십자가 앞에서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며 울부짖어야 합니까? 이렇게 말씀드리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모욕, 수모, 고통, 굴욕' 속에서도 주님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 앞에 닥친 운명을 거역하지도 않고 빠져나갈 길을 도모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의 얼굴을 늘 주님께 향한 채로 자신에게 닥치는 악에 의연히 맞섭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이 그 눈물 앞에서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까요?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아니 우리네 사람들의 욕심의 끝은 어딜까요?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존재가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도다." 예수 고난회원들은 성무일도를 바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고 장엄하게 이 기도를 바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불려진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 중의 끝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이시라 고백하며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당신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가장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높게 십자가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자기 비움(Kenosis)'야말로 우리가 제일 어려워하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에서 회개하는 영적 회개가 될 것입니다. 기실 모든 악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나를 버리지 못하면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남의 탓이 커 보이는 이유도 기실 내 안에 커진 나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더 큽니다. 해서 자기 비움은 겸손을 통해 이르는 영적 성장의 최고봉이 아닐까 싶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는 간단한 기도는 사실상 죽음 앞에 선 예수님의 굳은 의지입니다. 그전에 'Passion of Jesus Christ' 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겟세마니의 기도를 마친 주님께서 혼자 말씀하십니다. "I am ready" 그리고는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극심한 고통들을 한 번의 저항도 없이 다 받아들이십니다. 십자가의 삶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기도를 세 번이나 바치시고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신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한 우리들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는 네 뜻대로 해도 된다.'며 겟세마니 동산의 유혹이 순간마다 다가옵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우는 Kenosis의 삶은 '이것을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알게 되고 하느님처럼 된다.'는 교활한 원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우리들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어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오늘 '호산나 다윗의 후손,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하며 예수님을 환호하던 군중들이 순간에 돌변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은 "저는 아니겠지요?"하며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장담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모두 도망칩니다. 늘 편하게 지낼 때는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우리의 장담이 이웃 앞에서는 그저 초조한 마음으로 내 뜻과 욕심만 채울 궁리로 변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성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앞으로 거행될 거룩한 전례를 통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 가르치시는 주님을 배우고, 군중 앞에 벌거벗겨진 채로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숨까지 아버지의 뜻으로 채우신 예수님의 열정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금요일에 있는 전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배하고 영성체는 하지만 미사 없는 영성체 예식을 행합니다. 성토요일에도 평일미사를 봉헌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을 긴 어두움의 침묵으로 표현하며 성체 앞에서 기도하기를 권장합니다.
성주간 동안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당신을 온전히 비우신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서 좀 더 자주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거룩한 순례의 여정에서 회개했음을 행실로 보이는 참회의 생활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호산나 다윗의 후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 김 두진(바오로)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