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오래전에 이스라엘에 성서 공부를 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곳이 베타니아인데 그곳에서 예루살렘 구 도시까지는 걸어서 약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오전에 수업을 듣고 오후는 거의 자유시간인지라 매일 걸어 예루살렘 구 도시에 가 예수님의 행적을 찾아보는 것이 즐거움 중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성경에 두 장소로 언급됩니다. 하나는 라자로와 자매동생이 살던 곳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요르단 강(요한1,28)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베타니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마리아(11,2)와 그의 언니 마르타가 오빠 라자로 와 함께 살던 곳으로, 올리브 산 동편에 자리 잡은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십니다. 베타니아의 뜻은 두 가지로 추정합니다. 하나는 ‘벳-아니아’ 곧 ‘가난의 동네’입니다. 두 번째는 ‘벳-테에님’, ‘무화과의 동네’로 풀이합니다. 베타니아에 나병 환자 시몬이 살았고(마르 14,3) 라자로도 앓다가 죽었음을 생각하면, 그곳은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 많은 변두리 동네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월절 엿새 전 예수님이 라자로 남매 집에 오셨을 때, 마리아가 옥합 향유로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한 12,1-8 등). 이때 예수님은 당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마리아가 영원히 기억되리라 하시지만 제자들은 비싼 향유를 발에 붓는 건 낭비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낫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처럼 베타니아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지난주에 읽은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하심으로 바리사이들의 생트집이 들끓어 예수님은 자리를 피하십니다. 오늘 죽은 라자로을 일으키심으로 외적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입증 되지만, 마음이 완고한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요한 11,45-52)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치유하시는 이야기로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세상의 빛이시고 세상의 생명으로 계시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유다인들로부터 죽음을 위협받고 있는 예수님과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시는 예수님을 함께 보여줌으로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전후로 라자로 집에 자주 머무신 것과, 마리아·마르타가 오빠를 소개할 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요한 11,3)라고 하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가 각별했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베타니아까지 가시어 그를 살려내십니다. 다만 곧장 가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 더 머무신 건(요한 11,6-11), 라자로를 통해 당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묻힌 곳에 오시자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이 눈물은 단지 라자로를 사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가시는 동안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어두운 운명에 슬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의 세력과 맞서시려는 예수님의 비장한 각오를 시사합니다. 이는 앞으로 닥쳐올 당신의 죽음을 미리 걱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확신으로 아버지께 기도(겟세마니의 기도)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가지게 되는 산란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눈물을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어둠을 없애시려는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며 외적으로 보이는 눈물에만 집중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관을 쓰지 않습니다. 시신은 돌침대에 누이고, 무덤 입구는 평평하고 둥근 돌로 막아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입구를 막아 놓았던 돌을 치우라고 하시자 죽은 지 사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하는 마르타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하시며 부활은 믿는 자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표징이라 말씀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죽은 라자로의 소생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라자로는 히브리어로 ‘엘아자르’라 하는데, 하느님이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이름의 뜻처럼 라자로는 주님의 도움으로 두 번째 생을 선사받게 됩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겨내는 참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능력의 표징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죽음과 냄새나는 시신의 부패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능력을 예수님 통해 보게 됩니다. 즉, 라자로의 병은 죽었더라도 죽을병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11,4) 다른 말로,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느님의 구원능력에 대한 표징이며 예수님의 모든 표징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보이도록 해주고, 오로지 믿는 자들만이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라자로의 소생은 요한복음이 기록한 일곱 표징 가운데 마지막이자 최고봉입니다. 첫 표징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2,1-12)이고, 두 번째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사건(4,43-54)입니다. 그다음은 벳자타 못에서 서른여덟 해 앓던 병자를 고치신 기적(5,1-18), 네 번째는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신 기적(6,1-15) 다섯 번째는 물 위를 걸으신 사건(6,16-21), 여섯 번째는 날 때부터 소경이던 사람을 고치신 일(9,1-12)입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일곱 표징 중에 절정에 달하지만, 부활과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행복을 라자로는 얻었지만 다시 죽어야 하는 불완전한 소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죽음은 서서히 다가옵니다. 사실 행복이 상대적이듯 죽음을 대하는 마음도 각자 다릅니다. 미련 없이 편안하게 맞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재물·명예를 포기 못 해 발버둥 치는 죽음도 있습니다. 또 라자로처럼 요절하는 죽음도 있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어 죽음은 늘 우리게 두려운 존재지만, 우리는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공포를 잊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손님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운명에 순종하는 성숙함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는 말씀(요한, 11,25-26)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라자로 무덤에서, 삶·죽음·부활을 경험하게 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의 두려움 죽음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들어나는 것"이라 말씀하시며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하시며 어두움 중 가장 두려운 죽음을 이겨내십니다. 당신 스스로 죽음에서 일어서신 것처럼 말입니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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