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진 화단과 하느님 나라

 

 

 

 

 

변해진 화단과 하느님 나라

 

 

우리 성당의 동쪽 화단을 어느 자매님께서 깨끗하게 정리하셨습 니다. 보는 이마다 훌륭한 화단이 되었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아름답게 화단을 꾸며 주신 자매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가라지의 비유를 듣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잔디밭을 보면 오늘 말씀의 비유는 쉽게 설명이 됩니다.

마태오복음에만 나타나는 가라지의 비유와 공관복음이 함께 전하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그 청중을 군중으로 하며, 하늘나라의

의미를 다각도로 전하고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 람” 에 비유됩니다.(24) 그런데 문제는 밭에 “덧뿌려진 가라지" 입니다. 가라지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밀과 비슷한 잡초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아는 것” (7,16–20; 12, 33 참조)처럼 “밀 가운데 뿌려진 가라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씨가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26)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다." 마태 13, 37-39

 

하늘나라의 자녀라는 표현은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원래는 이스라엘이 하늘나라의 자녀였지만, 나중에는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가 하늘나라의 자녀가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나라의 자녀라고 함은 새 백성인 교회 안에서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므로 좋은 씨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선택된 백성(이스라엘)이라 불릴 정도로 하느님의 은총아래 신앙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악의 세력에 노출되어 덧뿌려진 씨앗도 우리 안에서 함께 자랍니다. 가라지 비유의 우의적 설명에서 씨의 근원을 “사람의 아들과 악마”에 두고, “좋은 씨와 가라지”를 “하늘나라의 자녀와 악한 자의 자녀”(38)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자녀들이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들”  (13, 23)이라면, 악한 자의 자녀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18, 6–7)과 “불의를 일삼는 자들”(시편 37, 1참조)입니다. 이렇듯이 ‘밭’ 이라는 ‘세상’ 에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과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가치 질서가 뒤집히고 선과 악이 뒤섞여 사람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오로지 자기 것만을 헤아리고 남들을 생각하지 않 는다. 그 때문에 세상은 이미 참된 형제애의 자리가 되지 못하고, 인류의 증대된 힘은 벌써 인류 자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한다.” [사목헌장]

37항

 

선인들과 악인들이 뒤섞여 사는 교회 실태와 매우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성급한 이들은 악인들을 교회에서 내 쫓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오늘 비유에서는 선인들과 악인들을 가리는 일은 하느님의 종말 심판에 맡겨야 한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악의 세력은 악한 씨를 곁 뿌려 가라지가 자라나게 합니다. 만일 하나둘씩 자라나는 가라지가 방치되어 한여름 잔디밭의 잡초처럼 은밀히 커 나간다면, 언젠가 그 신앙 공동체는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외적인 행사를 아무리 멋들어지고 성대하게 거행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갈등과 미움,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다툼과 충돌, 그리고 분열과 불목이 생긴다면, 이는 악의 세력이 뿌린 가라지가 그 공동체 속에서 빠르게 자라나고 있다는 적신호가 아닐까요?

 

‘밀과 가라지’ 를 바라보는 ‘종과 집주인’ 의 태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종은 가라지를 다 뽑자고 제안하지만 주인은 “수확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30)고 합니다. 밀의 뿌 리와 같이 엉켜 있는 “가라지를 거두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르기”(29)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의 확실한 구분, 즉각적인 상과 벌이 정의인 것 처럼 말하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악의 처벌이 아니라 죄인의 회개를 기다리는 인내와 자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9, 13 참조) 하느님께서 잡초를 얼른 뽑아내는 우리처럼 하셨다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뽑혀져 불구덩이로 던져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수확은 종말의 심판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자비가 영원하시지만 열매를 맺고 맺지 못함에서 밀과 가라지의 운명이 바뀝니다. 이런 종말론적 전망 안에서 마태오는 비유의 우의적 해석을 통해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 다. 현세는 믿는 이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시기로서 종말의 날에 불에 태워지는 가라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곳간에 들이는 밀이 될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경고합니다.

 

흔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농담 같은 뼈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저 내 눈으로만 보면 ‘밀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마음이 훨씬 커 다 뽑아내고 싶지만 내 안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음에 마음이 움찔 오그라듭니다.

 

화단을 가꾸기 전에는 화단이 작아보였습니다. 그러나 화단을 가꾸고 나니 훨씬 커 보이고 깨끗합니다. 이제 꽃도 잘 보여 말 그대로 꽃이 있는 화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화단이 확장되어 지는 것을 보니 여간 마음이 뿌듯한 것이 아닙니다. 넓혀진 화단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듯,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리듯 내 안에서 하늘나라가 넓혀진다면, 밀과 가라지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둔다”해도 별 문제는 아니겠다는 생각입니다. 하늘나라의 큰 그늘이 드리워지면 가라지가 열매를 맺기 전에 자연히 시름거리다 죽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하늘나라가 겨자씨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듯, 누룩이 부풀러 큰 그릇을 채우듯 커나간다면

내 안의 가라지 정도야 우습지 않겠습니까?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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