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하느님의 봉헌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봉헌

 

 

올해는 유독 눈도 많이 왔고, 혹독한 추위로 매서웠습니다. 요 며칠 내리는 비가 봄비이길 빕니다. 그런데 봄비치고는 좀 많다 싶습니다. 지하에는 벌써 비가 스며들어 축축하고, 물이 흐르는 곳도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기후 앞에 늘 투덜거리는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많으면 많다고, 적으면 적다고, 춥다고, 덥다고, 잘 투덜거리는 우리네 모습 앞에 오늘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이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기22,2)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렇게 비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는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로마 8,32)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선포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코 9,7)

이렇게 놓고 보니 첫 번째 독서에서는 사람의 아들을 두 번째 독서와 복음에서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친 아드님마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역시 투덜거림에 능숙한 우리의 눈으로만 보면 아브라함의 비정함이 크게 보이고, 하느님의 무정함까지 보이지만, 좀 더 깊고 길게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니, 우리 신앙의 투덜거림이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다시 모여 공동체를 만들고 예수님에 대해 회상합니다. 제자들은 모세와 예언자 안에서 예수님을 떠올렸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계명을 가져온 분이고, 엘리야는 이스라 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 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에 이 두 사람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겪고 난 다음에 비로소 예수님을 올바로 볼 수 있고 따라서 그 때 가서야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깨닫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하느님은 천대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합니다. 그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을 감행합니다.

이집트 탈출의 성공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하느님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분”(탈출 33,19) 으로 체험 됩니다.

예언자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하느님에 대한 말이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입니다. 왕과 사제들은

사회의 기득권자들이었고, 예언자들은 그들의 횡포에 맞서, 그들을 비판하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선포했지만,

결국 기득권자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들이 과거 모세가 깨달은 하느님,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일 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며,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하느님의 일들이었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과거 예언자들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 시대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과 성전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조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숨겨 놓았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고, 백성들을 심판하실 무서운 하느님을 말하면서, 율사와 사제 스스로 남을 심판하는 높은 신분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그들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  (마태 23,4)고 비난 하셨습니다. 사실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하는 지침이었고,

성전은 하느님이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현존의 상징 건물이었지만, 율법과 성전이 오히려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율법과 성전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숨기는 수단이 되었고, 무거운 짐이 돼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체험하고 가르친 하느님을 아셨습니다. 또한 과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는 데에 자기 목숨을 걸었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하느님 나라의 일을 실천하는데 당신의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고, 돌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그 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군림하시는 분이 아니라 섬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르 10,45)고 제자들에게 밝히셨고 실제로 섬기셨던 겸손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아드님을 우리게 주신 것과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의 봉헌을 감히 견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그토록 크신 사랑을 볼 수 있다면(로마서 8장 참조) 투덜거림이 감사로 그리고  그 감사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한 예수님을 닮아 우리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거룩하게 변모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살아 내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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