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를 들지 맙시다
오래전에 교리신학원에서 공부 할 때 였습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시간에 교수님이 사견이라 하시며 예수라는 양반 보다 바오로라는 제자가 훨씬 마음에 든다는 말에 많은 젊은 수도자들이 발끈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말을 아끼던 수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정의롭게 사는 것이 그의 수도생활의 목적이라고 말해왔던 그분이 교수님의 달변에 속이 아팠는지 일어나서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지난번에 설렁탕집에 갔는데, 어떤 스님께서 설렁탕을 드시더라고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약간은 승리에 도취한 웃음으로 교수님에게 말을 건넸지만, 교수님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약간은 무심하게 “자네 설렁탕 좋아하나?” “네 좋아해서 가끔씩 먹으러 갑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먼.” “네 그런 편입니다.” “자네는 수도생활을 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돼야겠네. 이 친구야! 자네는 매일 고기 먹으면서, 어쩌다 중이 한번 먹은 고기 가지고 왜 그리 난린가?” 모두들 호탕하게 웃었지만, 많을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내가 나를 볼 수 없고 남은 잘 보여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남의 행동은 크게 보이고 나의 행동은 보지 못하는 실수를 오늘 복음에서도 읽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과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예수님께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와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유대법은 간음죄에 대해서 엄격하였는데 간음죄가 성립하려면 간음하는 두 남녀가 현장에서 잡혀야 했습니다. 물론 목격자도 법정에 나와 증언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는 법정도 아니고 남자도 없습니다. 이는 이 여인을 고발한 사람들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기 위해 이 여인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만일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되며 동시에 그분이 가르치신 사랑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게 됨으로 그분의 가르침은 모순덩어리가 됩니다. 복음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얻으려고 질문을 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6절) 즉,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게 되고, 고발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하신다면 자비와 용서를 선포하신 예수님 자신의 복음과 모순됩니다. 또 정치적으로는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자로 고발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 정부는 유다인들에게 죄인을 재판하고 사형할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무언가 글을 쓰시는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을 떠난 죄인은 땅에 기록되리라"는 예레미아(17,13) 예언과 연관 지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일깨우고,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으니,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도록 보여준 예언자적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시고 나서 몸을 일으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조용히 말하시고 다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십니다. 먼저 예언자적 표지를 보여주셨고, 다시 말씀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러시고 나서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먼저 표시를 보여주셨고, (6-7절) 그 표지를 말씀으로 설명해주셨으며,(7절) 다시 표시를 보여주심으로(9절) 좀 더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땅에 쓰시고, 바로 하느님만이 죄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씀에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납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죄가 커서 그 자리를 빨리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빨리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실 성서에서 나이 많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제 그 여자는 간음죄로 고발되어 끌려온 죄인으로서 예수님 앞에, 예수님은 그녀를 심판하는 자로 그녀 앞에 남아있습니다. 당신의 죄를 묻던 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는지 묻던 예수님께서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는 하느님의 자비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았지만, 그 자비와 용서는 바로 이제부터 더는 죄를 짓지 않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용서라는 선물을 받았다면 새롭게 살아야 할 의무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게 부담이 됩니다. 다시 죄짓고 싶은 사람은 없음에도 노상 똑 같은 죄를 반복하는 범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큰 걸림돌 같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 뒤에는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생활이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해성사 하나만 믿고 매일 같은 죄를 반복하며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죄로 인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산다면, 다시 죄를 지어 스스로 아파하지 말라는 그분의 사랑의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죄를 짓고 죽은 것 같은 어둠속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에서 사는 것처럼 살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결정입니다. 또한 죄를 지어서 죄안에 있다면 그저 과거에 매달려 한숨 쉬고 가슴 치며 아파해 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새로 열어주신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살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 결단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판공성사를 보기 전에 먼저 오늘의 복음 묵상을 해 보기 바랍니다.
해서,……..나에게 그리고 이웃을 향해 돌멩이 들지 맙시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