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거룩한 시기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고통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기에 사랑의 십자가에 좀 더 가까이 가려는 신앙 안에서의 노력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십니다. 유혹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요? 무소유가 세상의 가장 행복한 길이였음을 설파하셨던 법정스님이라면 유혹이 없으셨을까요? 유혹에서의 자유는 유혹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유혹에서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이 유혹사화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릇 위대한 인물들은 명성을 날리기 전에 크나큰 시련을 겪으면서 그 위대함이 더욱 돋보이게 마련인데, 예수께서도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탄의 끈질긴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유혹을 극복하고 새로운 메시아 시대를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먹어야 사는 데 대해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굶주리는 이에게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빵을 갖다 주는 것이 더 실질적입니다. 그럴 때 그 빵은 하느님을 대신 전합니다. 형제 중에 가장 작은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준 것이요, 빵을 갖다 주는 나의 행위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빵이 사랑과 연민에서가 아니라면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굶주리는 이들에게 빵을 주셨지만 당신을 위해 빵을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고자 할 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때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음식을 즐겨 드시기도 하셨습니다만, 먹는 것도 굶는 것도 모두 하느님 중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은 결국 자신을 빵으로 내놓으셨습니다. 말씀인 그분은 우리도 자신을 빵으로 내어 주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권세와 영광: 먹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살 만큼 되면 우리는 다른 데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름을 날리고 싶거나 세력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또 세력을 행사하는 나라들은 평화를 위한다는 구실로 첨단의 살상무기를 생산해 생명을 위협합니다. 유명세와 세력, 재력을 갖춘다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임에도 예수께서는 명예와 권력에 마음을 두지 않으십니다.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기에 오직 하느님께만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기로 결심하십니다.
하느님 이외의 것에 의존하는 하느님 나라였다면 그리스도교는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을 높이고 싶은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신 말씀대로 섬기는 삶을 택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힘없는 자의 무력한 모습을 그분의 수난에서 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표징도 보이지 않으셨고, 어떤 힘도 행사하지 않으시고 고스란히 고통을 다 받으시는 힘없는 자로 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시험: 그 다음은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던져 보시오”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임을 아시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앞지르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의 뜻 앞에 순종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끈질긴 유혹은 특별히 생의 가장 힘들고 어두운 고통의 순간인 십자가에까지 따라와서 기세를 부렸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보낸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억울하게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불러도 응답 없는 하느님을 그래도 믿을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는 박해를 받는데도 아무런 조처도 취하시지 않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어갔듯이 그렇게 믿을 수 있을까요? 꼭 필요한 그때 조처를 취해주시지 않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교회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위대하게 생각하고 그분들의 이런 놀아운 용기도 하느님의 은총이라 합니다. 하느님을 받드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대로 내가 되어지는 것이지, 하느님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유에 대한 탐욕이 인간과 세상을 그르친다고 가르치십니다. 말씀 없는 빵, 공유하지 않는 소유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병들게 하고, 공동체 의식을 파괴합니다. 시장경제 사회가 부추기는 소비 주의는 주체성과 의식을 구속하고 생태계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님을 내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소유욕으로부터 해방되어 온전한 자유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모세는 해방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 이루고자 하는 해방은 죄에서 부터의 해방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욕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조건이 부족하지만 부족을 우리의 힘으로 채우려 해서는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제 2독서에서 말하는 의로움을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을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할 때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우리가 배워가야 할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