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시는 것을 보고 난 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앨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장기를 두다
보면 외통수가 있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수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항상 모든 면에서 밀리니까 작당을 하고 고민을 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 바로 세금 문제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그 시대 유대아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예수님이 만일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면, 예수님은 조국과 동족을 배반하는 반역자로 비난받을 판이요,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예수님은 로마 정권의 통치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정치범이 될 판이다. 그들은 외통수라 생각했지만, 역시 우문이었다.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은 이렇게 생겼다. 6년에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렸던 아르켈라오 왕(헤로데 대왕의 아들)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한다. 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하는데 주민세는 12세부터 65세까지
주민이면 누구나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 주민세는 꼭 로마 은전인 데나리온으로 바쳐야만 했다. 같은 해, 갈릴래아 지방 가믈라 요세 출신 유다가 주민세 납부 거부
운동을 벌이며 열혈당이 생긴다. 이들이 주민세를 거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신앙 때문인데, 로마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치는 것은 황제를 통치자로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옳지 않다는 것이었고, 또다른 이유는 데나리온
은화에는 황제의 흉상과 대비의 좌상이 있고, 황제를 신으로 떠받드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기에 데나리온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과 유일신 신앙에 반대되는 동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까지 온건한 입장을 취하며 주민세를 납부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현답이 들려진다. 그 때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황제가 주조하여 통용시킨 데나리온은 황제의 전유물이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데나리온을 사용함으로 황제의 통치권을 시인한 셈이 되었다. 그러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가? 하느님의 형상을 지난 인간 자신이다. 즉, 황제에게는 주민세만 바치면 되지만, 하느님께는 “몸과 마음과 정신과 생각을 다하여 사랑을 드려야 한다.”
(마태 22,37)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아주
도전적인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무엇이
황제에게 속한 것이며, 무엇이 하느님께 속한 것이냐?”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였다. 즉,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포도원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지, 로마제국의 소유도 아니고 로마에 협력하는 지역관리들의 소유도 아니다. 그러면
황제에게 속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곰곰이 새기면, 황제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분의 죽음은 결국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기 위한 그분의 사랑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경탄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완고한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릴까 더 골몰하기 시작한다. 우둔한 질문에 우둔한 생각까지 그들의 완고한 마음에 하느님이 자리는
없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삶,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