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영광스럽게 변모되었다. 사실 세례는 침수예식이
원칙이었다. 요즈음 새롭게 짓는 성당에는 세례대를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고 또 세례를 받을 때 침수하는
성당도 늘어가고 있다. 사실 예전 세례 예식에서는,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입고 있던 세상의 옷을 벗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세례대에 담긴 물에 온몸을 침수한다. 그리고
반대쪽 계단을 통해 걸어 나온다. 즉 입교자는 세상의 옷을 벗음을 통해 지금까지 걸치고 왔던 낡은 인간, 죄로 물든 인간,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을 세례대 저쪽 건너편에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 듯 세례수를 통과해 이쪽 즉 약속의 땅, 생명과 구원의 땅으로 건너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건너옴의 예식을
통해 입교자는 새 인간, 영적 인간 영원한 생명을 지닌 불멸의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온다. 즉 물은 생명을 상징하고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것이다.’ 사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은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 보다 더 은혜로운 날일 것이다. 하늘에 나의 이름이 기록된 날이요, 내 인생을 천상의 삶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날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우리가 이미 파스카의 신비를 세례를 통해 이루었다. 이 파스카의 신비는 계속 미사를 통해 우리게 전달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미사성제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기에 그렇다. 세례로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고 매일의
미사로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는 우리라면 우리의 삶은 당연히 거룩히 변모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데에 있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세례는 내어주고 쏟아 내는 삶을 시작하는
성사이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다. 재물과 권력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에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안일과 출세를 보장하기 위해 사는 데에 있지 않다. 개인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하느님이 아니시기에 그렇다. 성전은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는 민원실이 아니지
않던가?.
옛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 묻혀 사는 우리가
아니라 생명을 전하는 즉 생명의 땅, 영원의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 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오는 여정을 다시 살아내는 것이며 그것이 파스카의 신비를
우리 삶 안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읽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기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은 또 다른 출애굽 즉 파스카 신비를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고난과 죽음은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부활은
마지막에서 영원으로 옮겨지는 것이고, 부활과 승천은 세상에서 하느님께로 옮겨 가시는 파스카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순 시기의 여정에서 우리는 과연 파스카의 신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