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성지 주일
지금 우리는 교회 전례력 안에서 가장 정점이자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주간을 시작한다. 교회는 이 성주간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잘 묘사하고 있는 예수 수난 복음을 깊이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가 공을 세운 제후들에게 베푸는 아홉 가지 특전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제후의 권위를 드러냈다고 한다. 첫째 금수레를 타는 것, 둘째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는 것, 셋째 옷깃에 옥을 달아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나게 하는 것, 넷째 거처하는 집에 붉은 칠을 하는 것, 다섯째 천자가 거처하는 궁에 신을 신고 출입하는 것, 여섯째 삼백 명의 특별 친위대를 거느리는 것, 일곱째 금도끼, 은도끼를 들어 왕의 의장을 갖추는 것, 여덟째 붉은 활 한 벌에 화살 열 대, 검은 활 열 벌에 화살 천 대를 가지고 있는 것, 마지막으로 아홉째 검은 수수로 빚은 향기로운 술을 사용하는 것, 등 이를 이름하며 ‘구석’이라 한다.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당신 지상 생애 가운데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한 주간을 시작 하신다.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월요일에 세속적으로 보기에 더러운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다. 이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시고, 화요일에는 제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산란한 마음을 드러내시며 당신을 팔아먹을 자가 누구인지 말씀하신다. 함께 빵을 먹고 함께 잔을 마신 자의 배반을 듣는다. 수요일에는 유다의 노골적인 배반을 보여준다. 답답한 예수님,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라고 하심으로 당신의 답답한 마음을 토로 하신다. 성 목요일,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다. 만찬 중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만찬이 끝난 다음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다. 이윽고 체포되신 예수님께서는 성금요일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날을 맞이하신다. 부당한 재판을 받으시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마침내 금요일 오후 3시경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신다. 성 토요일에는 무덤에 계시다가, 주일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신다.
성지주일, 예수님의 첫 행적은 올리브 산 동쪽에 위치한 벳파게에서 시작하신다. 벳파게는 히브리어로 무화과의 집이란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벳파게를 떠나 올리브 산 정상으로 올라가신다. 올리브산은 예루살렘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해발 810미터 높이의 올리브 산 정상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110미터가량 더 높기 때문에 정상에 올라서면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많은 순례객들이 에리코에서 유다 광야를 거처 마지막으로 올리브 산을 넘게 되는데, 긴 여정으로 지친 순례객들이 올리브 산 정상에 도달하면,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함께, 꿈에 그리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그러나 오늘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런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조금도 없다.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예루살렘 성이지만 조만간 돌 하나 남지 않을 파멸이 닥쳐올 것을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이고, 이번 주간에 당신에게 벌어질 참혹한 일들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이스라엘 군중에게 임금이셨다. 중국의 제후처럼‘구석’을 갖추지는 못하셨지만, 금수레 대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동물은 어린 나귀였다. 말과에 속하지만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왜소하고 생긴 것도 좀 웃기고 생뚱맞다. 어린 나귀!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만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나귀다. 어쩌면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보여주시는 듯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존경과 환영의 표시로 나뭇가지를 길에 깔고,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아 놓는 군중들, 그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은 큰 차이가 있다.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크게 환영하고 박수를 치던 예루살렘 군중은 마음속으로는 세속적인 기대를 품고 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막강한 힘을 통해 강력한 통치자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정치적인 해방과 경제적 번영을 안겨줄 것을 기대하며 환호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가 조만간 저주와 악담, 고발과 십자가 처형으로 뒤바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위대한 승리자나 정복자가 타는 건장한 말이 아니라, 작고 왜소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이다.
고통을 이겨 내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희망과 한 몸처럼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 없이는 참 희망이 없으며, 희망 없이는 어떤 고통도 이겨 낼 수 없다. 이 거룩한 주간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영광의 희망”(콜로 1,27)이 되셨음을 묵상해야 한다. 탄생부터 시작해서 죽음의 순간까지 시종일관 계속된 예수님의 겸손, 죽기까지 내려가시는 밑으로의 행보가 돋보이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