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부활 제 4 주일 성소주일
시카고 지역에는 산이 없어 등산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 수도원은 산 위에 있어 아침 묵상이 끝나고 가볍게 산에 오르곤 했었다. 등산로는 없었지만, 여러 경로로 산에 오를 때 여러 차이가 있는 힘듦이 있다. 힘든 것에 따른 성취감과 희열감은 선물과도 같은 또 다른 재미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성소는 말 그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각해 보는 주일이다. 생각해 보니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여러 경로가 있다. 마치 등산을 할 때 돌아가는 길, 쉬운 길, 복잡한 길, 또는 바위가 많아 조금은 위험하고 힘들지만, 재미있는 길, …… 등산의 재미가 경로에 따라 다르지만, 목적은 산에 오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도 이와 같다. 어떤 이는 성직자로, 수도자로, 독신생활로 아니면 결혼 생활을 통해 하느님이라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오늘 복음에는 주님은 당신 스스로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 부모는 자녀들의 목숨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위해 희생은 물론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데 성부 아버지는 아들이 목숨을 내어놓을 때 만족하시는 분인지 이해가 어렵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아드님이 목숨을 내어놓아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보면 ‘사랑의 값은 생명’이다. 마치 물건을 살 때 돈을 내야만 하는 것처럼 사랑은 곧 생명이니 사랑도 오직 생명으로 살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를 죽여야 가능한 아름다움이다.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려 목숨을 내놓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주셨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그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심이 없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목자가 아닌 삯꾼이 있다. 삯꾼들은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기에 양들을 몰래 잡아먹거나 어미가 새끼를 낳으면 몰래 그 새끼를 팔아먹는 도둑놈이었다는 것은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삯꾼 목자에 대한 인상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다.” (필리 2,21)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쓸모가 없다고 느끼면 가차없이 양들을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2) 이리는 악령으로 어떤 사람은 만취하도록 유혹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을 불어넣고, 어떤 이는 교만으로 치켜세우고, 어떤 이는 분노로 파멸시켜 양들을 물어 가고 흩어 버린다. 삯꾼에게는 양들을 위해 이리를 쫓아내고자 하는 어떤 열의도 없다. 그는 오직 눈에 보이는 이익만이 있고, 양 떼가 아무리 크게 다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은 자기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쓸모없다고 느껴지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친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고 계신 친밀한 관계와 같은 가까운 관계에 있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고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두고 달아나지 않고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신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 양들을 지키시고 양들을 이끌어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 하신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생명을 바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마찬가지로 내가 돌보아야 하는 양떼나 이웃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내가 이웃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면 나는 착한 목자가 되어가는 중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