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0일 연중 제 29 주일 Fr. 김두진(바오로)강론

 

10 20일 연중 제 29 주일

요즈음 한국 뉴스의 시작은 늘 대통령의 부인의 이야기다. 권력을 가진 자 그리고 또 다른 권력을 꿈꾸는 자들의 싸움이 이제는 시끄럽다 못해 안타깝고 답답하다. 많은 이들이 권력을 꿈꾸고, 실제로 그 권력을 얻고 나서 굳이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권력의 맛이 달콤해서 잃지 않으려 하고 그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누를 수 있으니 좋긴 하겠지만,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의 좋지 않았던 말로가 자꾸만 떠올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하다.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영광을 받으실 때’, 곧 메시아로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한 사람은 예수님의 오른 편에, 또 다른 한 사람은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한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나라에서 두 형제가 모두 높은 자리에 앉아 세도와 권력을 부리고 싶은 모양이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예수님이 왕으로 군림하면, 자기들은 예수님 덕으로 출세하여, 사람들을 다스리는 특권을 누려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출세하여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하느님의 일을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오히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은 높으면 높을수록 군림하여 권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종과 같이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신다.”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종은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며, 섬기는 사람이란 돌보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설명하신다. 첫째가 되는 길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며, 예수님 스스로도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유언으로 성찬을 남기셨다. 그 성찬의 중심을 이루는 말씀은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몸.” “너희를 위해 쏟는 피.”라는 것인데,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말씀이다. ,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사람들을 섬긴 삶이란 뜻이다. 그런 삶을 사신 예수님을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을 사신 분이라 고백한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을 믿어서 그 분으로부터 복을 받아 나 잘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옛날 정화수를 떠놓고 소원성취를 빌던 그 마음을 연장하여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1독서는 예수님 메시아성의 본질을 밝힌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이사 53,1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세적 영광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을 따르는 순간 가난과 배척, 박해와 고난, 그리고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미워할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건, 그분이 먼저 우리 모두의 속량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내외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세상 곳곳에서도 자기 탓이 아닌 고통으로 무참히 짓밟히며 스러져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떠안으신 고통을 통해 세상의 고통에 존엄성을 부여하셨다.

2독서에서는 이런 의로운 종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히브 4,16) 우리의 대사제는 단 한 번의 십자가 희생 제사로 모든 이를 속량하신 분이다. 그분이 치르신 값으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를 믿고 확신할 때, 그분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믿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이가 바로 주님 어좌의 곁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생뚱맞게 권력과 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해야겠다. 섬기는 사람은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옛 생각에 멈춰 선 고리타분한 생각이다. 우리가 스스로 섬김과 돌봄을 실천한다면 절대로 종이 될 수 없다.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종이라 부를까? 스스로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자발적인 돌봄과 섬김이라면 그 섬김과 돌봄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는 하느님의 일이다.

오늘 스스로에게 묻자. 나는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어떤 섬김 어떤 돌봄을 사는가? 나는 말 그대로 시켜서 일을 하는 종인가? 아니면 자유의지로 사랑을 실천하는가? 권력으로 다스리는 사람일까 아니면 겸손한 사랑으로 다스리는 사람일까?

오늘 선교주일에 참 선교를 생각한다. 우리 성당이름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아니지만, 마실 물도 없이 살아가는 어려운 이웃에게 샘을 파주는 것은 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섬기며 돌보는 우리,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참 선교가 아닐까 싶다.

 

 

 

1독서는 예수님 메시아성의 본질을 밝힌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이사 53,1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세적 영광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을 따르는 순간 가난과 배척, 박해와 고난, 그리고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미워할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건, 그분이 먼저 우리 모두의 속량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내외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세상 곳곳에서도 자기 탓이 아닌 고통으로 무참히 짓밟히며 스러져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떠안으신 고통을 통해 세상의 고통에 존엄성을 부여하셨다.

2독서에서는 이런 의로운 종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히브 4,16) 우리의 대사제는 단 한 번의 십자가 희생 제사로 모든 이를 속량하신 분이다. 그분이 치르신 값으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를 믿고 확신할 때, 그분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믿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이가 바로 주님 어좌의 곁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생뚱맞게 권력과 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해야겠다. 섬기는 사람은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옛 생각에 멈춰 선 고리타분한 생각이다. 우리가 스스로 섬김과 돌봄을 실천한다면 절대로 종이 될 수 없다.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종이라 부를까? 스스로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자발적인 돌봄과 섬김이라면 그 섬김과 돌봄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는 하느님의 일이다.

오늘 스스로에게 묻자. 나는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어떤 섬김 어떤 돌봄을 사는가? 나는 말 그대로 시켜서 일을 하는 종인가? 아니면 자유의지로 사랑을 실천하는가? 권력으로 다스리는 사람일까 아니면 겸손한 사랑으로 다스리는 사람일까?

오늘 선교주일에 참 선교를 생각한다. 우리 성당이름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아니지만, 마실 물도 없이 살아가는 어려운 이웃에게 샘을 파주는 것은 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섬기며 돌보는 우리,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참 선교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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