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 축일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닌 당신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교회는 고백한다. 그 왕권은 죽기까지 순명 하심으로 아버지께 들어 높임을 받으시고(필립 2:8-9) 당신 왕국의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왕은 구약에서 예언되고 준비되었다. 가나안 정착시기에 왕정의 필요를 느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의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탄생시키고 하느님으로부터 왕조의 존속을 약속 받는다. (2사무 7장). 그러나 다윗왕조가 몰락하자 종말의 왕인 메시아의 약속이 생기게 된다. (에제 34장). 신약으로 와서 왕이신 메시아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는 고통 받는 이스라엘에서 강력한 왕이 태어나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주고, 하느님의 영광으로 강대국을 만들어 줄 인간적인 희망과 현세적인 왕권관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의 왕국은 그런 왕국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였다.
왕이라는 표현은 ‘권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의 생명도 자기 생각과 뜻대로 좌우할 수 있는 소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왕이다. 없던 것도 있게 만들 수 있고, 있던 것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왕이다. 이런 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극이나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왕일 것이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난 왕이신 그리스도는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빌라도 앞에 죄인으로 서신 초라한 왕이시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당신 나라가 이 세상 것이 아니라면, 세상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봐서는 절대 이해되지 않는 분이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고 하신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요”하고 외치며 황제에 맞서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풀어주면 그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라고 빌라도를 으르고 협박한다.
세상의 권력자인 빌라도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선 예수님을 왕이라 부르고 그 왕을 따르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삶을 우리도 살아내야 한다고 빌라도 앞에서 담담히 말씀하신다. 아픈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죽은 이들을 살리셨던 그분의 사랑을 살아내야 한다.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신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진리에 속해 있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우리, 하느님의 자비로움,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낸 우리, 그 생명을 사는 우리는 그래서 하느님의 생명이 세상에 넘치도록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오늘 듣는 제 2 독서의 묵시록은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힘겹지만 세상에서 합당한 신앙인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온 어린양이 지셨던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을 뛰어넘어 참 생명과 사랑을 세상에 가져오게 하는 구원의 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읽어내는 이들의 신앙이 그리스도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 우리를 위한 진리가 된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고 하신 것은 왕이신 예수님으로 열리는 나라는 힘과 권력으로 군림하고, 판단하고, 억압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이시며 참 자유를 실천하는 신앙인이 따라야 하는 왕이시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게 하신 온누리의 왕이신 주님, 저희도 당신처럼 일상에서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당신의 남은 고난을 저희가 채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