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현양대회 미사
어릴적에 이발소에 가면 멋있는 그림과 좋은 말을 써
놓은 액자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푸시킨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 어릴적에
머릿속 깊게 각인된 모양입니다. 보신탕집에 써 놓은 이런 글도 기억이 납니다. “재물을 잃으면 적게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목숨을 잃으면 죄다 잃는 것이 다” 아주
좋은 말들인데 왜 사람들은 싸구려 이야기들이라 할까요? 걸린 곳이 이발소나 보신탕집이라
그럴까요?
오늘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과 이웃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된 103위 한국 천주교의 순교 성인들을 기념하는
대축제의 날입니다. 오늘 시카고 지역의 4개 성당이 모여 함께 순교자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 순교의 삶을 증거하기 위해 이 축제의 날을 지냅니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들어왔는지
모르는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의 어느 교회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평신도 자체에 의한
선교방식이었습니다. 천주교(서학) 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이미 조선시대 후기 17세기 초엽에 창설된 실학파에 의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실학파는 전통유학의
전근대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탈피,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태도에서 출발하였습니다.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실학파의 학자들은
천주교를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신앙으로 받아들여 소위 “비신자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신앙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고는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 편에 이승훈을 딸려 보냅니다. 1784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관련서적들과 성물들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초기 공동체가 임의로 만들어 실시한 “가성직(假聖職)제도” 또한
교회사에 유례없는 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791년부터
조선의 천주교는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겪게 됩니다. 초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이유는 서학의 평등사상으로
말미암은 양반위주의 사회질서 파괴와 유학정신의 근간인
조상제사의 거부였으나, 나중에는 정치적 다툼과
이권이 개입되었습니다. 모진 박해 중에도 신자들은 중국의 성직자와 1836년부터
프랑스의 선교사들을 영입하여 교세를
확장시켰고 결국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 두 명의 방인 사제를 배출하게 됩니다. 조정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00 년 넘게 계속되었고, 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대대적인 박해로는 1791년(정조15) 신해박해, 1801년(순조1) 신유박해, 1839년(헌종5) 기해박해, 1846년(헌종12) 병오박해, 1866년(대원군) 병인박해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 박해 중에서 기해, 병오,
병인박해 때 순교한 103명이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맞아 내한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들 가운데 최초의 방인 사목자였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훌륭한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 홍 유한 이란분을 소개합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신자는
아니었지만 천주학을 책으로 배우고 나서 매일 주일을 지켰답니다.
당시에 달력 이라는 것이 없어서 7째 날을 계산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7일을 정해 놓고 안식일을
지키며 지냈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자기의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었답니다. 그리고 은퇴한 후에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아예 산으로 들어가 17년 동안을 은둔자로 살았답니다.
비록 그가 세례를 받은 신자는
아닐지라도 우리나라의 최초의 은둔자요,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책으로
배운 서학인 천주학을 통해서 믿음을 살아낸 것입니다.
사실 서학인 천주학에서 믿음으로 옮겨진 세월은
짧지가 않습니다. 무려 170여 년이나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를 받기전에
이미 천주학을
통해 그 믿음을 실천하신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조상들은 배움을 몸으로
실천하며 하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70여년의 준비 기간을 통해 얻은 우리의 믿음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재물을 잃으면 적게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목숨을 잃으면 죄다 잃는 것이다” 지극히 지당한 말입니다. 목숨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순교자처럼
예수님을 따르는데 반대하는 “자아“와 “욕심“을 버리며 사는 것 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순교가 쉬운 일이 아니듯 자기를 버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내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를 생활 안에서 보십니까? 자기의 자아와
욕심을 버릴 때 그 십자가가 보이는 법입니다. 해서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비록 현세의
삶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순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아와
욕심을 버릴 때 내 십자가를 보게되고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으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것이 참 생명을
얻는 삶이고, 단지 죽어서 천당가는 것으로 보상 받으려는 심보가 아니라 지금의 이 삶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는
복음의 삶입니다. 십자가는 남이 우리에게 억지로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스스로 짊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거룩한 축일에 우리 조상들의 믿음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의 모든것을 버리며 지켰던 그들의 믿음을 배워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피로 지켜 온 신앙은
우리게
자신을 버리라하고 내 십자가를 보라하며 그 십자가를 짊어지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세상에 내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를
높이 현양하여 순교자의 후손임을 증거해야 한다고 순교자들은 우리게 말하고 있습니다.
Brief
Memo of the History of Korean Catholic
It was the beginning of
meeting of Catholicism and Koreans. In this meeting they received modern
European science and books from missionaries in
China and they brought them to
their home country. In that way, Catholicism, European science and many Western
books(translated in Chinese) were
able to come to Korea. Especially Western
books were interesting for many Korean Confucianists because it was new idea and
New World for them.
And then they started to study those books, it was a kind
of revelation for Confucianists in 18th century in Korea. It began with their
curiosity but later
they respected those studies because of their scholastic desires.
They called these studies Seo-hak(서학西學)which
meant Westernology or study of the
West, especially by retired scholars from
the Namin(남인:南人:southern
people) political faction. This Seo-hak was developed to CHUNJU-HAK(천주학
天主學: STUDY OF THEOLOGY), It is very interesting because the Korean Confucianists
call Catholicism not a Kyo(敎 religion) but the
“study” because
Hak(學) means
“study”. It makes sense because the first flowers of Catholicism were
scholars of Confucianism and to study God by themselves.
That was why they call
Catholicism a kind of the Study(hak 學) not religion(kyo
敎). Many people of Nam-in Political faction devoted to CHUNJU-HAK
(study
of Catholicism)as Catholicism and became
Catholic because they found out what the true path of life is through
Catholicism. “In 1777, when the
Silhak(실학實學: a
branch of Confucianism) patron Chong-jo ascended the throne, a group of
scholars led by Chong Yak-young(1762-1836) retired to a
secluded Buddhist
mountain temple to pursue their studies without distraction. After some debate
the scholars, including Lee Pyok, later to become a
Catholic evangelist,
decided that the truth they were seeking lay in Catholicism.” (Eric O.
Hanson Catholic Politics in China and Korea P26 Maryknoll,
N.Y.,: Orbis Books
1980)
During the time there were
many anonymous Christians in Korea. Especially a scholar named Hong You-han was
not a Christian but after studied
CHUNJU-HAK (Catholicism) from books he kept
the Sabbath every seventh day and prayed on whole day of the Sabbath by only
himself. At time,
it was very difficult to keep the Sabbath because Korea did
not use the solar calendar yet. Though it was difficult to keep, he kept the
Sabbath as every
7th day and he shared his property with the poor. Finally he
went to a mountain for thirteen years and kept his faith as a seclusionist.
Even though he
did not receive baptism from the Church, he was an extremely
good Christian. From the study of the West to faith in Catholicism, it was a
long journey
for them because it took 170 years. Finally, some of them had a
periodical meeting at Seoul, as the capital city of Korea after Lee Seunghun baptized
from Peking in 1784. That was establishment of Korean Catholic Church.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