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을 맞이하며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영어로 'Palm Sunday of the Passion of the Lord’ 라고 합니다. Passion은 고통이란 뜻보다 ‘열정’이란 뜻이 더 우위입니다.
인간 사랑에 대한 열정이 수난이 된 것이니,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성 금요일’ 은 그래서 슬픈
금요일이 아니라 ‘Good Friday’라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온 인류를 새로이 낳고 기르시기 위해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
지 고스란히 보여주시는 사랑의 절정, 거룩한 주간(성주간)의 시작입니다.
때는 축제인 무교절.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 그 방법을 강구하려 혈안이고,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장한 내면의 감정과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간절히 바랐다”, “다시는 먹지 않겠다”, “결코
마시지 않겠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은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렇게 간절히 바라신 이유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이 자리는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들로서는 예년과 같은 파스카요 축제요 식사 자리였겠지만 예수님한테는 죽음을 앞둔 고별의 자
리, 남겨주실 마지막 말씀을 꼭 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둘째,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역사적 사건인 이집트 탈출(출애굽)과
시나이 계약(모세의 십계명) 으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옛 계약을 새로운 의미로 완성 하고자 하시기에 반드시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자리
여야 마땅합니다. 곧 구약의 파스카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음식인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최후만찬 말씀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몸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요, 피로써 맺는 새로운 계약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계약으로 신약의 새 백성이 탄생하기에 예수님은 고난을 겪기
전에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라셨고,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
다.
식탁자리는 친교를 이루는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한 일들, 생일·결혼·회갑·장례뿐 아니라 명절, 심지어 사업에서도 빠질 수 없
는 것이 함께하는 식사입니다. 함께 먹기 위해서는 땅을 일구고 곡식을 추수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땀과 노고와
정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땅과 햇빛과 공기와 물과 바람을 주신 하느님의 섭리도 함께 배어 있기에 음식을 함께 먹는 식탁은 사랑과 생
명을 나누는 자리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식탁에서 말씀하시고 친히 음식이 되시어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먹거리가 되
실 그분은 ‘빵집’ 이란 뜻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짐승들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없음을 아시고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여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먹는 제자들과 일치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예식을 ‘주님의 식탁’, ‘주님의 만찬’이라 부르며 주님을 기억했고, 우리 또한 성체를 먹고 마시며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
랑을 이웃들과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22,21) 이 사랑의 식탁에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반자도 함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박해 당하던 시대에도 밀고자는 대부분이 같은 교우였습니다. 이런 괴로움을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
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그를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정답게 어울리던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떠들썩한 군중 속을 함께 거닐던 우리”(시편 55,1315) 우리의 세상
에서도 우리를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이들은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 함께 먹고 마시던 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 식탁에서 배반자에게도 빵을 주시고 그를 위해서도 피를 쏟아 부어 주십니다.
또 다시 맞이한 성주간(聖週間),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성주간 동안 우리는 또 다시 예
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인생’에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
의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커다란 신비입니다. 범인의 눈으론 이해
할 수 없는 역설입니다. 무한한 능력의 주님께서 사악한 무리들의 끝도 없는 폭력 앞에 어찌 그리도 무력하십니까? 만왕의 왕께서 일개 병사들의 조롱
과 침 뱉음 앞에 어찌 그리 침묵만 하실 수 있습니까? 왜 메시아께서 인류 역사상 가장 고독한 모습으로, 가장 고통스런 모습으로 그렇게 죽음을 맞이
해야 합니까?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이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끼는 현상’입니다. 이때는 약간 비정상이 되고, 딴 사람이 됩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는 현상이 콩깍지 현상이다 보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습니다. 해서 ‘물질공세’로 나갑니다. 평소 ‘소득’으로
는 무리가 되는 고가의 선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어도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점점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더 나아가서 상대방을 위
해서라면 목숨 까지도 바칠 각오가 섭니다.
그렇습니다! 부족한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이처럼 한없는 ‘자기증여’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이 이
러한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증여는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천수만 배의 자기증여가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서 이루
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고 체험하는 시간이 거룩한 주간이며, 성주간 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은총의 시기 말입니다.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