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 부활 대축일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를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안내한다. 예수님의 빈무덤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그녀가 무덤으로 가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즉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알린다. 마리아의 빈 무덤 소식을 전해들은 두 제자는 놀라 무덤으로 달려가 예수님이 사라진 빈 무덤을 재차 확인한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말한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시각은 아직도 그녀가 만났던 예수님을 찾고 있다. 마리아의 머릿속은 오직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에 대한 걱정과 상심 뿐이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마리아는 무덤으로 향하지만, 아직도 어두울 때란 아직 하느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 속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마르 16,1) 마르코 복음의 입을 빌리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려 무덤으로 향했다. 금요일 저녁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시신을 거두어야 했으니, 향료를 제대로 발라드리지 못한 것이 마리아 마음에 내내 걸렸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죽음과 부재에 대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다. 황급히 마무리한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래서 아직도 어두울 때 예수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리려 아니 뵙고 싶어 무덤으로 달려간 것이다. 이런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노력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완전한 인식의 기초가 된다. 비록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부족하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의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더라도, 그분을 향한 애틋하고 절절한 우리의 사랑이 있다면 우리 역시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의 신앙은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기 3,8)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두렁이를 만들어 앞을 가리고 하느님을 피해 숨은 일이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기에 죄를 가렸던 두렁이를 팽개치고 오히려 그분을 찾는다. 그녀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15)라고 청한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는 자기의 죄를 두렁이로 가리고 하느님을 피해 스스로 세상을 버렸지만, 그분을 사랑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서도 곤욕스럽게(?) 두렁이를 팽개치고 그분을 찾았다. 사랑은 효율성을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20,3) 지금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없어진 예수님의 시신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관심 밖이다. 베드로보다 젊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더 빨리 무덤에 다다르고 그와 베드로는 똑같이 무덤 속의 광경을 목격한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은 깨닫지 못했지만, 유독 사랑하는 제자는 ‘보고 믿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을 다른 곳에 잘 개켜 놓을 리 없다는 표징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흔히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 한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꼬시는 유혹이고 가슴으로 하는 사랑은 행동하는 사랑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하고 싶고 싫음'을 떠나 행동부터 하게 된다. 사랑받던 제자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앉아 있다가, “주님 그게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소리 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슴을 듣는 귀를 가졌기에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표징을 통해 보고 믿을 수 있었다. 빈 무덤을 처음으로 발견한 마리아와 달려와 표징을 보고 믿게 된 제자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가슴을 들을 줄 알기에 많이 사랑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오늘 이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빈 무덤을 본다. 빈 무덤,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빈 무덤은 지나간 자리이며 죽음에서 삶으로 지나간, 파스카의 자리다. 빈 무덤은 혹 부활의 근거는 되겠지만, 부활을 직접 목격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빈 무덤은 제자들이 눈으로 직접 본 역사적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무덤이 죽은 이를 묻는 곳이라면, 빈 무덤은 죽음 그 자체를 묻어버리는 것이다. 빈 무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없애 버릴 자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진정한 예수님, 구원자,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빈자리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빈 무덤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 참으로 살아나셨다! 는 소리 없는 강한 외침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살아나셨다! 는 외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이 세상 안에 살아나셨다! 는 외침이다.
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