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주님 부활 제 2 주일
지난 월요일, 4월 하순에 눈이 내렸다. 5월에도 눈이 내리는 곳이 시카고이니 크게 이상하지 않지만, 그래도 성질이 급한 개나리는 노란 눈망울을 조금씩 보인다. 올해는 목련보다 먼저 성질 급한 개나리가 꽃피려나 보다. 올해는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분다. 예전의 봄 같지 않다. 사실 봄바람은 가지를 흔들게 하여 생명의 물이 가지 끝까지 전달되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 이런 자연의 섭리 안에서 푸른 잎을 돋게 하고 뿌리가 단단해 져 나무는 푸르름으로 자라게 된다. 모든 식물들이 겨우내 죽음의 잿빛에서 봄의 푸르름으로 단장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듯하다.
오늘 복음에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믿음이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와 쌍둥이가 된 것 같이 우리의 믿음을 대변한다.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활의 증거와 증표를 보고 싶은 것은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이 부활에 대해 쌍둥이라 불리는 사도 토마스처럼 의심과 회의를 가질 수 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의심 많은 토마스"는 증거 없이 절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사도 토마스가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의 말만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 드리려 하지 않았을 뿐이고, 구체적인 증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그 상처들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보기를 원했다. 사실 아무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토마스의 이런 태도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 온 마음으로 열정적인 고백을 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사실 의심은 또 다른 의미에서 관심이다. 관심이 없다면 의심할 필요도 없다. 신앙에 대해 의심한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의심일 것이다. 그 의심은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또 다른 신비의 길이다. 사실 토마스의 마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가 아니라 그 부활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희망 찬 관심이었다. 주님의 부활을 너무 믿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믿게 해달라는 희망찬 외침이었다. 그러기에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 후 온 마음을 다해 열정적으로 고백할 수 있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예전에는 부활 2 주일을 '사백주일'(卸白主日)이라 불렀다. 부활 성야에 세례 받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깨끗해 졌다'는 표시로 흰옷을 입고 있다가 오늘 벗는 날이기 때문이다.
부활 성야 때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제 하느님에 대해 모두 알게 되었으니 교리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배워야 한다는 교회의 마음이 오늘의 독서에 들어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나 많은 이들이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고 전한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적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도들의 믿음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모범적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나 그 책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방법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됨을 아는 것이다. "무슨 신자가 저래?" "역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주님을 믿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습니다."라고 천주교 신앙 안에서 선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은 우리도 주님 안에서 구원을 보고 부활하리라는 믿음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의 삶이 이웃에게 사랑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실망을 보여주는가? 우리의 믿음과 기쁨을 본 이웃들이 예수님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의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며,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에 이른다.
우리 모두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공동체의 삶으로 초대받아 사는 우리가 오늘 들은 복음 말씀에 우리가 배울 교훈이 숨겨져 있다. 공동체가 기반을 이루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구성원의 한 사람이 됨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게 된다. 부활사건 후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마다 공동체적인 차원이 있었다. 사실상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된 것도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토마스가 그 자리(공동체)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믿음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인가? 라 물어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답하고 싶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와 전례에 참석하고 공동체적 찬미를 드리는 것은 신자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각 지체들이 공동체에 모여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모습이 완성되어질 때 우리는 공동체적 찬미를 드림과 동시에 모임 그 자체로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보고서야 믿는 믿음 탓할 수 없다. 하지만 보지 않고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낼 수 없으면 이것은 탓해야 하고 지탄 받아야 할 신앙이다.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토마스의 실수는 보고 믿고 싶은 믿음이 약한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지만, 반대로 토마스의 고백은 우리 신앙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