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연중 제 27 주일 복음 묵상
믿는다는 말을 라틴어로 Credere라고 한다. 이 말은 Cor (심장, 마음)과 Dare (넘겨주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는 대상에게 내 마음(심장)을 넘겨주는 것이다. 내 마음을 넘겨준다는 것은 내 전부를 넘겨주는 것이므로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넘겨 드린다는 뜻이 된다.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루가 16,13)라고 하시며, 약은 집사의 비유와 지난 주에 들었던 부자와 나자로에 관한 비유 후에 나오는 말씀 이다. 이렇게 재물에 현혹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사도들은 의기소침해져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한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믿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갖고 있지 않다고 돌려 답변하신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신통력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는 능력이 믿음이라 생각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마귀의 유혹을 소개한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초능력,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괜찮고, 부귀영화를 사람들에게 주는 초능력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며,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신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나무야 바다에 가서 심겨져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심겨지면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가진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겨자씨 만한 믿음도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 안에서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은 사람도 없고, 산을 바다에 던진 이도 없다. 예수님도 그런 일은 하지 않으셨다.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다는 말이나,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표현은 믿음은 우리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게 한다는 뜻이다. 지금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장차 역사의 종말에 엄청난 기적을 이룰 것이라는 말씀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종말의 엄청난 기적에 비하면 지금의 믿음은 제 아무리 큰 믿음이라 할지라도 한낱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작음과 종말에 있을 기적의 큼을 대조하는 말씀인 것이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종과 같은 생활이라고 복음은 말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품삯 꾼은 보수를 요구하지만, 종은 무상으로 일한다. 종이, 들에서 농사짓고 목축하는 일을 하고 집안에서는 부엌일을 하고 청소도 한다. 그렇게 일을 많아 한다고 해서 보수나 사례를 바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율법교사나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과응보 사상에 젖어 있었다. 인과응보 사상이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장사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다. 당대의 생각대로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따른 보상을 하느님께 받겠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오해한 짓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오해를 종과 주인의 관계로 수정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열심히 한 대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1독서는 "때"에 대한 예언자의 한탄 섞인 질문으로 시작된다.
주님의 말씀을 입에 담아 전하건만 정작 이루어지지는 않으니 예언자로서 면이 서지 않을 뿐더러, 조롱과 비웃음을 사게 되니 한탄이 나올 밖에 없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 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주님의 명확한 대답이다. 주님의 때는 늦어지는 게 아니라 늦어지는 듯 보일 뿐이다. 그러니 기다려야 한다. 사실 기다림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상대방이 꼭 온다는 믿음이 있을 때 시간이 늦어져도 기다릴 수 있는 것처럼, 믿어야 기다릴 수 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주어진다’고 한다.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은총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믿음이 시작되고, 은총으로 그 믿음이 완성된다.
믿음은 명령과 복종, 상하 종속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진 않다. 예수님은 친히 섬기러 왔다고 밝히시며 종의 자리를 자처하셨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이로서 주인이 종이 되고 종이 주인이 되는 대 반전이 이루어졌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당신 몸과 피로 우리를 배 불리신 “그런 다음에 먹고 마실”것이다. 우리 앞에서 종처럼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발까지 씻어 주시는 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믿음은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과 피조물이고 종인 우리 사이를 단단히 엮어 주는 끈이다. 산을 옮기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겸손한 믿음으로 할 일을 다 함으로 그분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