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선언

 

 

 

행복과 불행선언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옹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 날, 말 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새옹지마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또 마냥 기뻐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의미의 고사성어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행복과 불행의 선언을 듣습니다.

마태오에는 진복팔단이라 하여 여덟 개의 행복선언이라 하지만 잘 읽어보면 아홉 가지 행복선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는 루가복음에서는 네 가지 행복선언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이들과 불행한 이들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고, 반대로 배부른 사람들, 웃는 사람들, 좋은 말만 듣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위의 세 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나머지 하나는 복음사가가 가필했다고 성서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이 세 개의 말씀에 나오는 불행한 사람들이 왜 행복한 사람이 되는지는 명확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선정을 베푸실 때가 되었으니,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배부르게 되며 웃게 될 것이다. 못난 자들이 비록 지금은 비참하지만, 오래지 않아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그 처지가 아주 달라지겠기에 그들을 복된 사람이 된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누구인가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가난이나 굶주림이나 슬픔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버리고 타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면 복된 사람이 될 것이지만, 우리가 인간의 기준을 선택 한다면 우리의 삶은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행복과 완성을 향한 길 또는 방향을 정해 주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며…….사람의 눈을 생각할지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말과 같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현실의 잣대에 빠져 있습니다. 아무리 써도 돈이 남아도는 부자들이 우리가 모방해야 할 상징으로 높이 추켜올려지고 있는 반면, 곤궁한 사람들은 우리가 거들떠 볼 필요도 없는 사람들로 멸시 당하고 있습니다. 굶주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풍성함 안에 살면서 꼭 굶어야 빼는 날씬한 몸을 가꾸기 위한 다이어트 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는 사람들도 사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기회를 거부당할 때 체험하는 좌절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행복의 길을 편하고 쉽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그런 운명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라고 하신 것은 분명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결국 그들의 운명의 역전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흥청거리는 삶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 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우리의 가치들을 평가해 보라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서 늘 마음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바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래서 가진 것이 많아서 더 이상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불행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늘 가난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변화란 영적인 변화 즉, 회개를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해야만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지향하며 삽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맞습니다. 부유하게 살고 싶고, 배부르게 살고 싶고, 웃으며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잘못 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배부르기 때문에 지금 웃기 때문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을 지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하느님의 법도 그럴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하고, 참 행복을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인지도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두진 바오로 신부

 

 

 

 

 

 

 

 

목록

'오늘의 미사' 게시판 최근 글 목록

제목
작성자
날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