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오시 자, 사람들은
각자 다른 언어로 말을 하지만, 듣는 사람은 자기 언어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성령이 오심으로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성령으로 마음이 열려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원활하게 의사소통 하는 사회가 인간을 존중하는, 풍요로운 사회일 것이다. 모두가 같은 말 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킨다. 성령은 인간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하게
의사 소통하며, 풍요롭게 살도록 하신다. 인간의 풍요로움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할 때 가능하고, 자비와 용서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는 것은 창세기
2장이 전하는 인간 창조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그들을 새롭게 하셨음을 뜻한다. 오늘 전례의 화답송에서 우리는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시편의 기도처럼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우리의 바람이다.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즉, 긍정적으로 한 번 말하고 다시 한 번 부정적으로 말하여 강조하는 화법이다. 복음서들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 화법인데 이를테면, “믿고 세례 받는 이는 구원받겠지만 믿지 않는 이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16,16) 이 말은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뜻이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위협이 아니다. 해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용서받지 못한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어떤 경우에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던 말이었고, 그것에
반대하신 예수님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고 믿으셨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까지 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주어졌다.
우리가 성령강림 축일을 해마다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살자는 것이다. 우리 서로의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을 우리 안에 살려내자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숨결,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자비롭게 또 은혜롭게, 우리 주변을 볼 수 있는 숨결로 살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는 것이다. 화답송에서
우리가 기도하듯이,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우리 안에 보내시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우리와의 차이를 극복하려 하지 말고, 우리의 차이를 다양함과 풍요로움으로
볼 수 있는 생명, 곧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있도록 빌어야 할 것이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자.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는가? 우리의
얼굴이 생명을 전하는 사람처럼 부드럽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변하는지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 가며 성령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보자. 또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성령과 함께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보자. 예수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숨결을 오늘 받아들이는 우리가 됨으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우리가 되자!
오소서, 성령이여, 당신 숨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