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고 말한다. 이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말씀이
하늘에서 들렸다고 전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성령이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었으며,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약속이다. 하느님의 영을 우리의 숨결로 삼아 살겠다는 약속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신앙인인
우리는 좌절한 사람, 실패한 사람,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회가 오면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심지가
꺼져 간다고 등불을 꺼 버리지 않고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꺼져가는 생명들 안에 주님이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보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나 한 사람 잘 되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여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종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거룩한 예식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복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눈에는 놀랍게만 보인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눈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효과가 없을 것 같은데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생각의 반대로 일을 하시는 분이신
것처럼 보인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 말씀이 더욱 실감 가는 얘기가 된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 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지만 그분은 이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분이시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것에 대해서 더욱 실감나게 표현하는데,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께서 저에게 세례를 받으십니까?”
하고 예수님께 묻는 요한에게 “지금 내가 하자는 대로하여라. 그래야만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진다.”하시며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다. 하느님을 세례 줄 수 있는 인간,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자녀로 올려 놓으셨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며 내가 커지면 커질수록 하느님을 작아지고 내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하느님께서는 커지시는 것인 것을 굳이 외면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가정생활이라고 틀려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커지면 커질수록 배우자와 자녀들은 작아지고 내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배우자와 자녀들은 커진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말씀이 아닐까 싶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내가 작아진다는 것이 분명 손해 보는 것이고 권위가 실추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하느님의 방법으로는
이것이 은총을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내가 작아 짐으로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
커지도록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의 감옥에 묶여 있는 내 자신을 풀어주는 것이고
내 편안만을 고집하는 우리 자신의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자신을 풀어주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작아짐으로 우리 이웃이 커지게 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이웃 안에 머물러 계신 그분이 커지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우리 세례 때의 감격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가 세례 때 하느님께 드렸던 그 약속들을 점검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작은 자로 그분의 일을 살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