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사순 제 2 주일
지난주일 우리는 복음을 통해 주님의 광야에서의 유혹을 들었다. 오늘 주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영광 받으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장엄하게 선포된다. 몇 주 후 주님께서는 해골산에서 돌아가실 것이다. 따라서 사순 시기는 주님께서 광야–타볼산–해골산으로 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예수님은 유혹과 시련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수난을 받으시지만 이 모든 여정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가의 문제다.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고 장엄하게 선포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해 보라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한다.
요르단 강 세례 때 하느님의 아들로 장엄하게 선포되신 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타볼산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다시 영광스럽게 선포된다. 그러나 해골산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의 예수님처럼 다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을 당하신다. 유혹과 수난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표시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 받은 표시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단련 받는 표시가 된다. 그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자녀들이라면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도록 우리에게 고통으로 단련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단련에 함께 하신다.
오늘 복음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와는 달리 1독서로 들은 창세기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다. 그가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할 찰나에 그 아이를 살리라고 하신다. 그런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은 골고타 산위에서 무참하게 살해 되신다. 그래서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느냐고 반문한다. 예수님은 그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고통 없이는 무엇도 새로 태어날 수 없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을 깨는 고통이 있어야 하며 이 고통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살리는 고통이 되기에 기쁨의 원천이 된다. 이 고통은 내가 받아야 할 고통이며,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고통이다. 이것이 고통의 생산성이다. 고통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고통 없이 자신은 물론 어떤 누구에게도 생명을 선사할 수 없다. 오늘 타볼산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그래서 수난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사순을 지내고 있는 지금 우리,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고통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알을 깨는 고통들이다. 이것을 이겨낼 때엔 타볼산의 예수님 처럼 더 영광스러운 나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이곳에 머물자고 간청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십자가 없이 영광만이 있는 산 위에 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독려해 산 아래 현실로 내려오셨듯이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경쟁과 낙오, 갈등과 싸움, 미움과 배척이 상존하는 산 아래 현실이다.
사람마다 산 아래 현실은 훨씬 어렵다. 아픈 자녀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산 아래의 삶이고,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가장을 바라보는 곳도 바로 산 아래의 삶이다. 산 아래의 삶은 보고, 또 봐도 즐거움 보다는 힘겨운 십자가들이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감내하기 버거운 십자가들이다. 이런 산 아래 현실은 누구에게나 냉혹한 현실이다. 진정한 기쁨과 영광은 오늘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 뒤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런 고통 없이 아니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유혹의 밑밥일 뿐이다.
"주님, 제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던 베드로의 유혹에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해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도록” (II 티모1, 8) 불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특권이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다가 오시어” 다정히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시며 격려하신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겐 십자가는 더 무겁고 무섭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17,7) 하시는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세상이 주는 안락함에 주저앉지 말고 우리의 십자가를 보며 나약함을 떨쳐내는 우리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