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보의 비애 좁은 문
함께 사시는 신부님께서 병원에 입원해 일주일간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치료를 받는 기간 내내 먹지 못하고 IV주사만 맞고 계셨습니다. 늘 배가 고파 한 10파운드 정도 살이 빠졌겠지 하며 배고픔도 잘 참으셨답니다. 집에 돌아와서 몸무게를 재보니 살이 빠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6파운드 더 쪘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의사나 간호사 선생님들은 잘 아시는 얘기겠지만, 우리 둘은 서로 쳐다보며 "어찌 이런 일이?" 하며 의아해했습니다. 퇴원 한 후 삼일이 있다가 다시 재보니 그 전보다 살이 3파운드 빠졌다고 기뻐하셨습니다. 사실 신부님이 살을 빼기 위해 매일 걷고 운동하시며 얼마나 노력을 하시는지 알고 있는 저에겐 그저 웃기는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랑하듯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니 나는 구원받겠지만 다른 사람은 어떨까요? 하는 식의 질문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대답 하십니다. 왜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좁은 불편한 문으로 가라고 하실까?
지금은 예전에 비해 살이 조금 빠졌습니다만, 나처럼 뚱뚱한 사람은 일단 좁은 것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좁은 문은 들어가기 힘든데…….. 하는 생각이 들자 왜 내가 살이 이렇게 쪘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살은 먹는 양보다 운동량이 적을 때 몸에 들러붙습니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불평하지만 살찌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몸은 정직하기 때문이지요. 맨 처음엔 얼굴로 그리고 점차적으로 배로…..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배가 나오면 여러 가지로 건강에 적신호가 옵니다. 먹는 것은 일단 입에서 맛있고, 안 먹으면 배도 고프니까 쉽고 즐겁게 먹을 수 있지만 운동을 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당분간은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오히려 운동을 하면 몸이 아픈 경우가 있어 꾸준히 계속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욕망에 젖어 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많이 먹고 빈둥거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자 "영적으로 날씬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는 생각에 머물렀습니다. 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며 주님의 새로운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영적인 운동(Practice)아닐까요?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만족에 젖어 거기에 머물다간 영적으로 비대해져 좁은 문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 다 아는 대로 실천하고 산다면 좋겠지만, 아는 대로 살지 못하고 늘 자신의 욕심에 가려 남을 보기에 앞서 내 욕심에 나를 맡겨 점점 영적인 비만만 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이 닫혔습니다. 아무리 열어 달라 졸라도 열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문을 두드리며 "주님,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어찌 모른다고 하십니까? 제가 어디에 가면 "누구 잘 아시죠?" 혹은 "내가 누구를 잘 압니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함께 밥을 몇 번 먹은 것이 잘 아는 것일까요? 아니면 누가 하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고 잘 아는 것일까요?
우리는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평소에 당신과 함께 식사하고 당신 가르침을 받은 사실에 따라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친분관계에 따라 심판하시지 않고 사랑의 실천 여부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새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그 믿음은 요란한 괭과리에 불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 나라의 입구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편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뛰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이기에 본능으로만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게 될것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이기는 것이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영적인 여정은 마치 흐르는 강물 위에 조그만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끊임없이 노를 저어 자기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본성에 맡기고 편하게 주저앉아 있으면 그 배는 욕망의 바다로 향할 뿐입니다.
좁은 문은 무작정 어려운 문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의 진리를 말하는 정도의 길 편한 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내려주신 십계명에 충실한 길,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계명을 이행하는 길.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만 실천해도 되는 이 길이 언제부터인지 가기 싫어하는 고지식한 길,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해서 쉬웠던 길이 나만 찾는 이기심으로 인해 어려운 좁은 문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종말에는 이방인들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너희(유다인들)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분을 들먹거린다 해도, 실천(Practice)하지 않으면, 즉 계속 움직이고 노 젓고, 사랑을 살아내지 못하면 결국 우리도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몸이 정직하듯, 우리가 사랑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인 몸도 비만해집니다. 그저 나만 고집하는 아집에 사로잡혀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는 욕심 가득한 뚱보가 될 것입니다. 좁은 문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영적인 비만에서 영적인 날씬함을 찾는 방법은 사랑으로 몸을 단련하여 좁은 문을 즐겨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뚱보의 비애를 모르도록 사랑의 바다로 빠져 듭시다!
김 두진(바오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