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는 게 가능한가?

 

원수를 사랑하는 게 가능한가?

 

아무개야 밥 먹어라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아 밥 먹는 것도 잊게 할 만큼의 재미있는 놀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꼭 그렇다할 놀이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마 그 때에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배가 고파도, 조금 힘들어도, 재미가 없어도, 그저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혼자 사는 세상은 무척 재미없는 세상일 것이라는 것을 배우는 중이었을 겁니다.

 

반면 '핵가족'이라는 말도 이미 옛말이 되었습니다만, 요즈음 친구들과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혼자서도 재미있게 놀 수 있는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아이들이 혼자서 노는 것이 함께 하는 것 보다 더 재미있음을 배우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고 혼자서 하는 것이 더 만족하고 힘들지 않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남들이 여러분에게 해 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해 주시오" (마태 7,12) 라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황금률 앞에서 한 번쯤은 뒤로 물러서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하면 나도 그렇게 하지, 다른 이들이 뛰어들면 나도 거기에 동조하지, 왜냐하면, 혼자 그렇게 하면 마지막에 바보 되는 건 나뿐일 테니까…….. 그래서  "남들이 내가 바라는 것을 하도록 하라"는 법칙에 의해 살려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목적지에 남보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유일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니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격하라는 조금은 과격할 만한 배움들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짜 불행한 일은 이런 말들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옳은 방법이라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다윗은 사울 왕의 통치에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사울 왕은 거대한 병력을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고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을 때, 그는 사울이 하느님이 선택한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어 다윗은 사울 왕을 살려 줍니다. 하느님 사람에 대한 존중과 용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황금률은 그리스도 신앙인 모두를 바보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황금률을 말씀 하시기에 앞서,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성경의 내용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고 말한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마태 5:38.  동태복수법인 이 법의 처벌은 하느님의 율법에서 규정하는 적법한 절차를 거친 뒤에에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이 법을 왜곡해서 적용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구실 삼아 복수심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 잔인하게 앙갚음을 하게 됩니다.

레위서는 앙갚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19,17-18)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타이르는 노력을 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뺨을 맞은 사람에게 다른 뺨을 내어주라(맞지 말고 맞아주라)고 말씀하시며 공격이나 모욕을 뛰어 넘어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가를 말합니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하심으로 (빼앗기지 말고 주라)말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폭력의 희생자가 아니고 자발적인 행동으로 했으니 보복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나는 당신이 나에게서 억지로 뺏어 가려는 것보다 나는 자발적으로 당신에게 훨씬 더 많이 가져가라고 할 용의가 있다는 자세를 보여 줌으로 폭력을 앞지를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즉 그들도 다윗이 사울 왕에게 했던 것처럼 악을 선으로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의 독특한 신학적 접근방법으로, 흙으로 빚어진 아담과 하늘에서 온 그리스도(마지막 아담)를 비교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자연적 생명체"였고 둘째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바울로의 핵심적인 관심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비록 첫 사람인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지만 세례를 받음으로써 둘 째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사회가 만든 법칙에 따라 살려는 유혹을 받고 있지만 우리는 복음이 주는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을 선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신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자비 안에서 심판도, 단죄도, 용서도 가능해 집니다.

 

세상을 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굳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꺼내 들지 않더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내 안으로 좁혀진 시각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시각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에게 복음은 앙심을 품지 말고 자비을 가지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비로운 시선으로 살라하십니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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