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좀 합시다!
여자들이 결혼을 하면 이름이 바뀝니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부인의 성이 남편의 성으로 바뀝니다. 그렇지만, 이름이 불리는 것 보다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불립니다. 그래서인지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하신 분들의 이름을 부르면 많이 당황해 합니다. 오래 전에 제 이름도 변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대신 보통 수사님 혹은 신부님으로 불립니다. 이름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중요한 호칭인데 이름보다는 직책이나 타이틀로 불립니다. 자기를 나타내는 것보다 직책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까요? 김 아무개가 김 사장님 혹은 김 회장님으로 불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들은 대로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Yahweh)이십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여호아(Yehowah)로 부르는 이 이름의 뜻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야훼는 존재하다 (hawah 또는 hayah)라는 동사의 제 일인칭의 형태로서 "나는 존재 한다"로 설명될 수 있고, 인간의 입장에서 2인칭을 써서 "그분은 존재 한다" 또는 "그분은 다른 것들이 존재하도록 하시는 분이시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그분께서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도록 하시는 분이시기에 주인이 되십니다. 신앙이란 이런 주인께 가난한 이들(Anawim)이 필요한 것들을 빌어 얻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없는 사람이 사정하고 구걸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윔(Anawim)에 대한 설명을 사전을 통해 보면, 구약 성서에서는 궁핍한 자, 가련한 자, 억눌린 자, 핍박받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은 무엇보다 정신적 성향이나 마음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난이 지니는 한계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가난이 우리의 한계이긴 하지만 이 가난을 통해 얻어지는 부유함이 신앙이란 말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은 가난한 자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특권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약시대의 하느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두 똑같이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셨지만, 우상숭배 등 죄악을 저지름으로 하느님의 벌을 받아 광야에서 죽어야 했음을 본보기로 삼으라합니다. 우리들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산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처럼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의 죽음이 회개하지 않아 벌 받아 죽은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시고 난 후 비유를 들어 하시는 말씀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입니다. 잘라버리겠다는 주인의 의도와는 달리 포도 재배인 중재가의 역할로 일 년의 시간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매정하게 잘라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매 맺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 스님이셨다가 개종하여 사제가 되신 분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하버드를 졸업한 독실했던 천주교 신자가 스님이 되신 분도 있습니다. 이 분들의 삶의 변화는 죄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또 부처님을 만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는 변하고 삶까지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뵙고 회개하는데 바울로의 이 회심이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개념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사울이었던 바울로는 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성과 흠 없음을 간직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표현대로 유익한 것이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 모든 유익함과 자랑스러움을 포기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된 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유익하고 자랑할 만한 것들은 장애가 되기에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쉬운 말로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지금까지의 삶을 버린 것이 바오로 사도의 회개요 회심이었습니다. 강도짓 하던 사형수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회개입니다. 죄에 초점이 맞춰있기에 눈물과 움츠림은 있지만 바오로의 회개는 삶과 가치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눈물과 움츠러듦이 아니라 그에게 회개는 깨달음과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아서는 것(metanoeo)도 있지만 변해야(epistrepho) 산다는 지난주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려준 무화과나무의 열매 맺지 못함과 회개에 대한 말씀은 단순히 죄를 짓지 말고 회개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경우처럼 열매를 맺기 위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시는 분에게 가난한 이들(Anawim)이 빌어 얻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공짜로 얻어지는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님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회개하는 것은 우리게 불리는 '그리스도인'의 (Anawim) 이름 값을 하자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값 좀 하고 삽시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