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성전의 정화와 함께 새 성전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열정을 다루고 있다. 즈카르야 예언자는 야훼의 날이 오면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1)고 예언하였다. 메시아의 때와 성전 정화를 예언한 즈카르야의 예언은 오늘 복음의 근본적인 의미를 제시해준다. 채찍질과 상을 둘러엎으며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그가 곧 구약의 성취이며,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던 메시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 제 1 독서에는 모세의 십계명이 전달된다. 유다 전통은 대부분의 계명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지 않고 미래형 직설법으로 씌어 있다. 즉, “살인하지 말라 (Do not kill)” 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는 살인을 안 할 것이다. (Thou shalt not kill)” 로 되어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 때, 생명을 파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창조주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존재가 되며, “그대는 살인을 안 할 것이다.”는 율법이 현실이 된다. 즉 우리는 하느님과 동 떨어져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기쁨과
사랑으로 율법을 깊이 생각하고 지키는 가운데, 서서히 자신들의 주님을 더 잘 알고 더욱 깊이 닮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신앙의 발전을 위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들을 오늘 제 2 독서에서 밝히고 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표징은 증거를 요구하는 계산적 신앙을 뜻한다. 이를 따르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분일 뿐이다. 지혜를 찾는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철학을 발전시키며
끊임없이 지적 세계를 건설했지만, 이성적 합리주의 안에 갇혔다. 이들은
이성으로 파악되는 우주적 이성을 신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결국 인간적 지혜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어리석음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선포”는 사람들의 기대와 정반대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느님 능력의 표징인데, 그 대신 무능력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인데 그 대신
어리석음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어둠을 극복하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인간이 기대하던 참 지혜이며 하느님 능력의 실현임을 알고 믿게 된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열정적인 성전 정화의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다. 성전 마당 한 가운데서도 외부에 속한 구역인 이른바 “이방인의 마당”에서는 여러 장사꾼과 환전상이 특히 축제일을 앞두고 대 성황을 이루었다. 순례자들이
성전에 바칠 짐승과 성전 세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성전 세는 고대 시리아 화폐로만 지불해야
했기에, 성전에는 환전상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런 환전상의
책상을 뒤엎고 또 장사꾼을 내 쫓았다는 것은 우리 에게도 의미 있는 말이다. 알다시피 오늘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세우겠다는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몸을 두고 한 말이고, 우리의 몸도 성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 자신을 정화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휘두르시면서 장사꾼을 쫓아내셨 듯, 우리 안에 장사꾼의 마음을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장사꾼의 마음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하느님과
장사하려는 마음부터 몰아내야 할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던 예수님을 닮는
것은 십자가의 이치를 깨닫는 지혜로움이 아니라 십자가의 삶을 사는 어리석음 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은 우리를 참 기쁨에로 인도할 것이다. 부활의 영광이 바로 십자가의 어리석은 죽음에서 비롯되었듯, 우리가 살아가는 십자가의 삶은 기쁨의 부활을 미리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