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말씀이 오늘 우리가 들은 제 2독서에서만
열 차례 나오고 오늘 복음에서는 아홉 차례나 반복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즉, 당신께서 받으신 사랑으로 제자들을 선택하고
사랑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들도 예수님에게서 받은 사랑의 삶을 살아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 보이고 다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 기쁨은 예수님과 결속되어 있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한 공동체 안에서 가득 할
수 있는 종말론적 기쁨이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더불어 주어지고 체험되는 기쁨이므로 아무도 뺐지 못하는
영원한 기쁨이다. 그 기쁨은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기쁨이다. 즉 친구라는 칭호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명하는 사랑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동기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말한다. 즉,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 주신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고 가르치셨다. 사람들의 불행은 하느님이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하였고,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제물 봉헌에 잘하지 못하면, 하느님이 벌을 준다고
가르친 유다교의 지도자와는 달리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도, 벌주지도 않으신다고 가르치셨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이라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죽어 가셨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고 하며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한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 포도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사랑의 수액 즉, 사랑의 DNA 때문이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강하신 분이시지만, 그분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상대를 제압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다행스럽게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듯,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만약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무모님처럼 우리가 잘못할 때 마다 우리를 간섭하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함께 있는 법 아니던가? 사랑 안에 크게
돋보이지 않는 것이 겸손일지도 모른다. 겸손은 비굴함이 아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처신하는 종은 겸손하지 않고 비굴한 종이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 한 자리 얻어 보려고
소신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행동을 우스갯소리로 꼬리친다고 한다. 그 반대로 겸손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마음이다. 겸손하지 못한 사랑은 일방적이고, 상대를
지배하는데, 그것은 횡포이지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횡포가 벌어지고 있는가? 그러나 생명에 숨결이 있듯 사랑에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어떤 겸손이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세리, 죄인 등과 예수님은 함께 어울리셨다. 상대방에 맞추어서 스스로를 낮춘 겸손. 우리에게 겸손은 어렵다. 우리는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며 과시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복음의
말씀이다. 우리가 초라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듯이, 우리 이웃이 우리 앞에 초라하게 보여도, 그 이웃과 함께 있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머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