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계절에 따라 변하는 대자연은 참으로 신비롭다. 봄이 되면 겨우내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나무 끝에 새 잎과 꽃봉오리가 싹터 나오지만, 죽은 가지에는 새로운 생명이 싹틀 수가 없다. 이처럼 모든 생물에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그 무엇이 있다. 우리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이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의 생명력이 되고 영혼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 계셔야 하는데 천주 성령께서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하신다.
성령 강림 대 축일에 우리 성당에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와 아홉 가지 열매를 바구니에 넣어 뽑기를 한다. 몇 년째 참여하고 있는데, 내가 꼭 뽑고 싶은 열매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아서 그때마다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다. 누군가는 내가 이미 그 열매를 지니고 있어서 더 내려 주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성령의 열매가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풍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설령 성령께서 그 열매를 저에게 주지 않으시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주신다면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도들은 서로 다른 언어들을 말했지만 모두가 소통할 수 있었다. 바벨탑을 세워 인간의 교만을 드높이려 할 때 그 교만을 꺾으시려 사람들의 언어를 섞어 놓아 서로가 소통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성령께서 오시면 서로가 소통 할 수 있고, 성령의 부재에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이 제자들을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 놓은 채 어두움에 머물게 했는지 인간적으로 이해가 간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라고 가만히 두겠느냐는 불안감이 문을 꼭꼭 잠그고 있게 했을 것이다. 그 어두움은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평화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약속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꼭꼭 닫힌 마음에는 평화의 자리조차 있을 수 없었다.
잠긴 문을 그대로 여과하듯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들의 나약함과 부족한 믿음 두려움을 넘어 그들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신다.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실 때, 비로소 그들의 어둠이 걷히고, 닫혔던 마음이 평화로 넘치며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었지만 부활하여 살아 계신 분이시라는 확신은 제자들의 어둠을 기쁨의 빛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는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평화와 성령이 함께 하신다. 예수님의 숨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시는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이 지니게 될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사죄권을 지니고 교회 공동체를 거룩하게 정화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용서하여라!
하느님의 숨이신 성령을 받으면 사제만 고해 성사실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표시로 우리 모두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불안감 아닐까 싶다. 나만 손해 보면 어쩌지? 나만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면 어쩌지? 나만 욕먹는 것 같아 어쩌지? 그러나 용서는 마음이 같아지는 것이란 뜻의 합성 한자어다. 같을 여(如) 와 마음 심(心) 이 합쳐진 단어가 용서할 서 (恕)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용서가 가능해 진다. 아니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지니고 있다면, 두려움과 어두움을 걷어내고 꼭꼭 닫힌 문을 열어 내기가 수월 해진다.
오늘 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에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자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고 전한다. 이상한 언어를 알아듣는 것은 또 다른 은사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알아들으면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심령 기도라고 하는 언어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아무런 뜻도 없고, 아무런 지향도 없이 소리만 내고 있다면 기도가 아닌 것처럼 간절함을 아는 사람은 간절함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격과 업적을 체험하는 것 역시 성령에 의한 것이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 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우주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은 예수님의 오심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함께하고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바로 그 성령이시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 모두를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이끌어주는 분이시다.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힘도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성령은 메마른 사막이 옥토로 바뀌는 것처럼 한 인간의 존재를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킨다. '주님 도움 없으시면 저희 삶의 그 모든 것 해로운 것'뿐이라는 성령 송가처럼 성령을 뺀 신앙은 울리는 징처럼 소리만 클 뿐 실속이 없다. 이런 성령과 함께 하려면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다. 성령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기도, 묵상, 성체조배, 미사와 같은 교회의 모든 신앙행위 안에서 성령을 체험할 수 있다. 성령님 저희에게 머무시어 당신 칠은 베푸소서!
오소서 성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