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4일 부활 제 3 주일
불쌍한 목련이란 생각이 들었다. 올해 목련은 화창한 날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하고 저렇게 시드나 보다 싶었다. 꽃 몽우리 앞에서 그렇게 찬바람이 불어대고 흔들어대도 우리 성당의 목련은 꽃을 화창하게 피워냈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시카고의 봄은 샘이 많아서 또 언제 눈이 오고 비바람이 몰아칠지 알 수는 없지만, 봄은 분명 우리게 왔다. 나무도 이제 새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새싹이 돋아나는 나무를 보니 많은 생각이 든다. 나무는 위로 올라갈수록 줄기가 가늘고, 내려올수록 줄기는 굵어지고 튼튼해 지는 삼각형의 모습인데 반대로 사람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역삼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싶다. 바람이 불면 금방 넘어질 것 같은 역삼각형의 모습이 이렇게 보기에도 불안하니 얼마나 세게 움켜쥐고 버텨 내야 할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도 이런 반 자연적인 역삼각형의 불안한 모습 때문에 생겨 지는 자연스런(?) 폭력이 아닐까 싶다.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많은 평화 유지군이 있다. 그들은 소위 세계 평화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면서 무력으로 평화를 지키고 있다. 평화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정당화된 전쟁들 앞에서 그야말로 평화가 폭력을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그리도 염원하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의 웅크린 마음 한가운데에 서시어 평화를 주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의 이 한마디는 제자들의 전인적인 치유를 가져온다. 스승을 배신한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삶에 대한 절망으로 상처 난 제자들의 마음을 모두 회복시킨다. 이 치유와 전인적인 회복은 참된 평화가 머무는 자리다. 참된 평화는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풍족함이나 안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참 평화는 갈등이나 고통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 평화는 우리가 밖에서 보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갈등과 두려움의 한복판에 있다. 세상은 평화유지를 위해 갈등과 두려움을 폭력으로 없애려 하지만,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예수님의 평화는”(요한 14,27) 용서와 회복으로 시작하며,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 맺기에 있다.
성경에서 죄는 윤리적인 잘못만을 뜻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이다. 성경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느님 안에 살게 되고,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느님과 단절된 채 탐욕의 자아 안에 머물 때 죄에 빠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메시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이르는 모든 일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섭리임을 믿고 회개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선포한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하신 수난 예고와 부활이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참된 회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세상의 악에 대한 승리가 선포되고, 죄의 용서가 선포되었음을 믿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시기까지 하는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받은 평화의 선물은 삶에서 만나는 다른 형제자매들 과의 관계를 통해 확산해간다. 이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를 전하는 사도가 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법정이나 혼인성사 때, 증인을 세우는 까닭은, 그가 자신이 보았던 것을 끝까지 바르게 증언하라는 의미가 있다. 제자들은 과연 부활의 참된 증인으로 거듭난다. 배신자요, 겁쟁이였던 베드로는 오늘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분명히 보았던 부활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 15). 그 같은 부활의 참된 증언을 듣고 또 들었던 우리 역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역삼각형의 무거운 삶이 아니라 삼각형의 자연스런 모습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보여주며 참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될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