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연중 제 30 주일
오늘 복음은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거지의 이야기다. 어떤 거지인데 가문과 이름까지 거론될까? 아마 이스라엘의 많은 이들이 아는 유명한(?) 거지인 듯하다. 전승에 의하면 바르티메오는 매우 부자였던 사람이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집안이 쫄딱 망하고 거기에 눈까지 멀게 된 불운의 사나이였다. 당대의 생각으로 그가 죄를 지어 하느님의 벌을 받아 망하고 눈까지 멀게 된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그런 죄인이 감히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치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 더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부르니 자신의 전 재산과도 같았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한다. 예수님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시며 치유해 주신다. 집으로 돌아가든지 네가 가려던 길을 가든지 “가거라.”하셨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 아마 눈이 멀었을 때 자신이 생각 했던 다윗의 자손이 도저히 자신과 어울릴 수 없는 분이라 생각했지만, 소박하고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군중과 함께 어울리며 인자한 모습을 보이시는 새로운 “다윗의 자손”을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런 바르티메오처럼 우리의 삶과 신앙을 다시 보면 어떨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기준, 선입견과 판단들을 겉옷 벗어 던지듯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삶과 신앙에 대해 눈먼 상태가 되었을 때 간절히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된 우리의 눈은 새로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 문제아에게서 놀라운 재능이, 꼰대에게서 지혜로움이, 미운 사람에게서 사랑스러움이, 죄 많은 사람에게서 용서가,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고통의 십자가에서 부활의 영광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 에게도 구원의 희망이 보일 것이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우리가 하느님께 바리는 바가 무엇인지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답한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간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그는 그전에 보았던 것들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전에 보았던 사랑하는 사람들, 멋진 세상, 아름다움들…. 그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다시 보게 됨으로 기쁨을 찾는다
우리가 그 전에 보았던 것 중에 지금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 멋진 세상, 그 아름다움들을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 혹시 내 안에 갇혀,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 대들보를 보지 못하며 남의 눈의 티만 보는 갇힌 마음이기에 기쁨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이가 먹어가는 배우자지만, 아름다움과 멋짐은 그대로이고, 귀염둥이 아이들이 훌쩍 자라나기는 했지만, 사랑스러운 모습은 그대로이며 그 전보다 훨씬 나아진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왜 전에 보았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이 눈뜬 소경이 되었을까? 노안이 되어 잘 보지 못하는 것들 중에는 침침해 보이는 글씨만이 아니라 예전에 보았던 아름다움도 어느새 포함 되어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르티매오는 믿음으로 다시 보게 되는 것뿐 아니라 구원을 살게 된다. 내가 지금 무엇을 놓치고 사는지, 내가 무엇을 못 보고 사는지를 알게 되면 다시 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통해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이웃이 다시보여 참 기쁨과 구원을 만나게 될 거이다.
“와우 네가 다시 보인다!”는 뜻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에게서 진면목을 보았을 때 하는 감탄의 말이다. 해서 다시 보이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다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전에 보았던 아름다움을 다시 보이게 된다는 뜻은 우리가 잃었던 진면목을 다시 찾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신앙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힘들게 살면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하느님이 내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냐며 시간도 재능도 그리고 노력도 봉헌 할 이유가 없다며 불평하며 신앙 안에서 어둠을 사는 이들도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무엇을 보았기에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지금 무엇을 보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절망과 어둠에로 끌고 가는 것일까?
하느님의 사랑은 강요된 사랑이 아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고 모두에게 구원의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 분이시지만 거기에는 강요가 없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갇혀 봤던 것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이 구원도, 기쁨도 그저 멍에로 다가올 뿐 기쁘지도, 슬프지도 못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차지도 뜨겁지도 못하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우리가 살아낸 그 자유가 방종인지 자유를 위장한 폭력인지는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확연히 들어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꾸중을 이겨내고 바르티매오가 외치고 간청했듯,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