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고통의 학교 ”
광주 살레시오 수도회의 성체조배실에는 제대 뒤쪽에 한문으로 된 액자가 있습니다. 보통으로는 십자가가 걸려 있는데 그곳은 큰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딱 한자로 된 한문 한자. 괴로울 고 (苦)자였습니다. ‘苦’ 괴로울 고자는 초두머리와 열십자 그리고 입구 자가 결합된 글자입니다. 초두머리는 눈썹에 해당하고 열십자는 눈과 코 그리고 입구 자는 입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이 괴로울 고자는 인간의 얼굴을 형상해 놓은 것입니다. 삶에 찌들린 인간의 고통을 얼굴에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고통이란 괴롭고 아픈 것입니다. 왜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만 하며 고통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또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고통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 변화와 정신적 변화를 겪을 때 인간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가장 괴로운 고통은 무엇일까요? 1위는 작열통: 몸이 불에 탈 때 느끼는 고통이며 2위는 신체의 절단의 고통이고 3위는 출산의 고통 곧 산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통은 죄의 벌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과 아담이 계약을 맺었는데 아담이 이 계약을 어기는 죄를 범함으로써 인류에게 고통이란 벌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는 노동이란 벌이, 여자에게는 산고라는 3번째로 고통스런 벌이 주어졌으며 이 둘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벌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죽음은 가장 큰 고통일 것입니다.
베리만의 ‘겨울 빛’이란 스웨덴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신은 왜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침묵하고 계시는가?’‘인간은 무엇 때문에 고통 받는 삶을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의 삶을 통찰하듯이 근심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조명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의 침묵으로 인해서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습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왜 인간을 고통 속에서 구원하지 않는 것일까? 거창한 의문 부호로 시작하는 영화는 점차 개인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파고들어가면서 그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냅니다.
‘아무도 성직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아. 관심을 가질 때는 풍문이 나돌 때일 뿐'이라고 성직자인 주인공의 대사는 인간의 고통의 근원에 다가가는 핵심적인 대사입니다. 그들이 가지는 모든 괴로움과 고통의 주된 원인은 인간의 외로움과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의 침묵을 탓하며 자신의 고민을 꺼내놓기 바쁘지만 서로의 고통과 외로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베리만은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하면서 자신만의 고통만을 앞세워 신을 찾는다면 어쩌면 영원히 신은 침묵할 것이다.’
우리들은 “예수님은 저의 주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입니다. 세례 받음으로써 우리는 모두 고통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스승님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죄의 벌이신 고통을 짊어지고 가셨기에 제자들인 우리도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에 대한 예고를 세 번씩이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을 자원하여 나서시려는 예수님에게 베드로는 달려들어 ‘맙소사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고 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고통의 선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하는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에도 참여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영원을 위한 훈련입니다. 인생은 영원을 위하여 훈련을 하는 고통의 학교입니다. 학교생활에 시달리듯 고통의 학교에서 시달리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 불평을 터뜨리고 신세타령을 늘어놓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고통의 학교에서 아주 많은 것을 매우 철저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할 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고통을 봉헌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라고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고통의 학교에서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될 것입니다.
– 김 길상 안드레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