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 부활주일에 겨우내 죽은 듯 움츠렸던 목련이 때맞춰 알렐루야를 노래하듯 꽃들을 활짝 피워 부활을 축하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일이 서술됩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 선포됩니다. 죽었던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기에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으로 향합니다. '아직도 어두울 때'라고 하는 것은 그녀가 아직 하느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 속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마르 16,1) 마르코 복음의 입을 빌리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을 향했습니다.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으려 했기에 그녀는 그분을 뵙지 못합니다. 짐작하건대 금요일 저녁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시신을 거두어야 했으니, 향료를 제대로 발라드리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겠지요. 그런데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을 것이라 짐작한 그녀는 급하게 뛰어가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덤에 묻혔다면, 마지막 임종을 지키지 못한 가족들은 그 시신이라도 보고 싶을 것입니다.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세월호가 3년이 넘게 긴 시간 동안 바다에 묻혀 있다 인양되어 뭍으로 옮겨졌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은 외칩니다. "이제는 실종자의 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이 되고 싶다!" 살아있는 얼굴이 아니라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보고 싶은 이들의 외침입니다. 바다에 묻힌 지 삼년이 훌쩍 넘었고, 그들이 배 안에 있으리라는 보장과 믿음도 파도와 함께 출렁거리지만 실낱같은 희망의 애틋함은 그들만의 것이 아닐 겁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도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희망도, 믿음도 가물거리지만,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사랑은 식지 않아 그분의 시신에 향료라도 듬뿍 발라드려야겠다는 사랑의 욕심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세기 3,8)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두렁이를 만들어 앞을 가리고 하느님을 피해 숨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부터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기에 죄를 가렸던 두렁이를 팽개치고 오히려 그분을 찾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요한 20,15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는 자기의 죄를 두렁이로 가리고 하느님을 피해 스스로 세상을 버렸지만, 그분을 사랑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서도 굴욕스럽게(?) 두렁이를 팽개치고 그분을 찾습니다. 사랑은 효율성을 따지지 않습니다. 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20,3) 지금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없어진 예수님의 시신입니다. 말도 안 되는 부활은 염두에도 없습니다. 베드로보다 젊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더 빨리 무덤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똑같이 무덤 속의 광경을 목격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은 깨닫지 못했지만, 복음은 사랑하는 제자는 ‘보고 믿었다’라고 합니다. 표징을 보고 믿은 것인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을 다른 곳에 잘 개켜 놓을리 없다는 그 표징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흔히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꼬셔대는 유혹이고 가슴으로 하는 사랑은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좋고 싫고'를 따지기 전 행동하게 됩니다. 사랑받던 제자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앉아 있다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 13,23-­25) 그는 예수님의 소리 뿐 아니라 그분의 가슴을 듣는 귀를 가졌기에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표징을 통해 보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빈 무덤을 처음으로 발견한 마리아와 달려와 표징을 보고 믿게 된 제자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가슴을 들을 줄 알기에 ‘많이 사랑할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이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무덤'을 바라봅니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순간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빈 무덤과 수의만 말합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은 TV 드라마를 시청하듯 예수님의 부활을 Slow motion으로 '다시보기'로 돌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를 가리고 있는 육중하고 큰 돌을 치워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동안 내내 제 가슴에서 울리던 소리는 바리사이들과 지나가던 군중들의 빈정거림 이였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마태오 27,40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이 큰 바위는 십자가의 고통에서 내려오고 싶던 내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처럼 내 안에 있는 십자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알게 되는 디딤돌이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 2,4­-5) 빈 무덤 앞에서 절대로 본적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은 부활은 증명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예수님의 빈 무덤은 혼돈에 가까운 의문들 앞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믿음의 성숙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믿지 못하면 혼돈의 어두움으로 남아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신앙의 신비이지만,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보여지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형제자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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