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향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요새 말로 Handy
Man이었다. 고향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 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병자에게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분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선입견이 이토록 무섭다. 예수님은 한 번 얻은 선입견에 머물지 말고, 이웃 안에 새로움을
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그들이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일이었다.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의 언어 안에서 우리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하느님은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지엄하신 분이고, 예수님은 그 지엄하신 분의 막강한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왕이신 하느님의 후계자, 곧 세자가 된다. 그런 선입견에 머물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도 있을 수 있다. 하느님을
이세상의 높은 권력자에 빗대어 지극히 높고,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무섭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허울 좋은 말에 불과하고, 신앙생활은
선행을 많이 하여 공로를 쌓는 데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상품 할인권을 모아서 상품을 싸게 구매하듯, 신앙생활도 전대사와 한대사를 부지런히 얻어 모아서, 지엄하신 하느님의
엄한 벌을 면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의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하느님을 생각하면, 하느님을 베푸시는 은혜로운 아버지로 받아들 일수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한 처세의 원리로 하느님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어떤 분인 지를 알게 한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하느님을 새롭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초기 신앙인들은 유대교에서
얻은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 그들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새로움을 받아들였다. 그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은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오늘 복음은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한다. 고향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바를 선입견으로 삼은 나머지, 그분
안에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움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의 병고와 실패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벌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병든 이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셨다는 것은 병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다. 벌주는 일은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보아야 하는 새로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불행을 겪은 것은, 우리의 실패가 하느님의 벌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일이었다.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이 실패자로 생을 끝맺은 것은, 이 세상은 의인을 의인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재물과 부귀영화를 인생 성공의 척도로 생각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최종 척도는 하느님이셨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고,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라 우리도
자비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알아듣는 새로움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실패가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선입견을 택하고 예수님의 새로움을 버렸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신다. 우리가 불행해도,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은 가까이 계신다. 우리의 선입견을 버리고, 그 하느님을 모셔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도 불행한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