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온 제자들을 한적한 곳에서 쉬게 하려하셨지만, 군중들이 너무 많아 쉴 틈조차 없었고, 오히려 목자 없는 양떼 같은
이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이제 그들의 육체적 배고픔을 해결하시려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여기 보리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다.”고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말씀드리면서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냐”고 되묻는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의 열왕기의 엘리사는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지만,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엘리사 예언자는 빵 한 개로 다섯 명을 먹인 셈이지만, 예수님은
빵 한 개로 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셨다는 말이다. 즉, 복음서
저자는 오늘의 이야기로 예수님은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를 훨씬 능가하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께서 그들을 먹이셨다고 한다.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면서, 그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땅에 와서 살도록 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먹고 마시지 못할 때, 하느님이 마련하신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으로 해방하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해방시키셨다는 구원의 체험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성찬 전례에서 사용하는 표현을
쓴다. 이는 성찬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인 빵 나눔에 참여하면서, 나눔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듣고, 지금까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축복과 풍요로움을 자기 주변에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집착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먹거리를 해결하려는 군중을 두고 예수님은 혼자서 떠나셨다고 한다. 이는 예수님은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분이 아니라 나눔을 가르치시고 그 실천하도록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은 나 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산다.
내가 가진 물질도, 지식도, 자격증도 모두 내
자신을 가꾸고, 내 자신을 풍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한 유혹이다. 유혹은 내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다. 세례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나눔의 풍요로움을 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나눔으로 말미암은 풍요로움을 살라고 권한다. 나눔은 하느님의 일이다. 해서 나눔 그 자체로 기적이다. 기적은 자연법이 설명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일 보다 하느님의 일이라 우리 눈에 놀랍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주변의 자기 중심적인
세상에서, 이웃의 어려움을 돕고, 나누고, 도우면서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풍요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는 사람이 된다.
하느님은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 안에 살아 계시는 분이시다.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십자가를 지는 마음 안에 살아 계신다. 내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서 이웃이 하느님의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데에 하느님은 사랑으로 살아 계신다. 우리가
나누어서 이웃이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