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이 최후 만찬에서 쓰신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듣는 신앙공동체가 성찬을 연상하여 성찬의 의미를 깨닫도록 촉구한다. 사실
오늘의 복음은, 지난주일 복음에 이어서 기록된 부분이다. 지난주일
복음이 전한 기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선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빵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말씀이며, 더 귀한 것은 바로 성체 성사이며 이 성사가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 하느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은총으로 내려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느님 앞에 처신을 잘하여 많은 혜택을 얻어서 살라고 가르쳤다.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 봉헌을 잘함으로 은총과 축복을 얻어내는 장사꾼의 신앙이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에 들면 혜택을 내려주지만, 괘씸하게
보면 벌을 주는 분으로 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내가
바로 그 생명의 빵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먹어서 생명을 얻는 빵은 예수님이며, 그 생명을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성찬은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킨다. 그래서 “결코 배고프지 않고…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찬은 우리를 기적적으로 변하게 하는 요술
방망이가 아니다. 성찬은 우리의 의지와 자유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먹어서 힘을 얻는 빵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오해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우리의 자유를 무시하고, 음식이 지닌 칼로리는
제공할지라도 먹는 음식에 따라 힘을 주는 것은 아니다. 쉬운 말로 쇠고기를 먹은 사람이 소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돼지고기를 먹은 사람이 돼지의 삶을 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몸이신 빵을 먹은 사람은 예수님의 삶을 배우는 것이지 예수님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분의 몸과 피를 마심으로 예수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성찬의 의미이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성찬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자녀가 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은 인간이 만드는 차별의 질서 안에 머물지 않는다. 높은 사람을 떠받들어 높이면서 비굴하게
처신하고, 낮은 사람을 순종하라고 짓밟으며 위세부리는 그런 차별의 질서 안에 살지 않는다. 그 차별의 질서에서는 잘 한 사람에게 상 주고, 부족한 사람에게
벌을 주지만, 예수님은 그런 차별의 인간 질서를 떠나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섬기기를 다 하고 자신은‘쓸모없는 종이었다.’(루가 17,10)고 말하면서
물러 설 수 있는 성숙한 자유를 예수님은 권장하셨다. 그것이 당당하고 성숙한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그런 헌신과 고독이 있는 사랑인 것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사랑의 생명을 우리 안에 자라게 하라는 말씀이다. 배불리
먹는 일에 삶의 의미를 두지 말고, 주변의 생명을 자유롭게 섬기고, 그
섬김이 끝나면, 물러설 줄 아는 당당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이
몸을 먹고 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먹기만 하면 저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나눔의
기적을 우리 삶 안에서 실천하여 성찬의 삶을 살아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