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연중 제 2 주일 하느님의 어린 양
창세기 3장을 보면,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려는 욕심으로 금지된 열매를 따 먹자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알몸을 가릴 수 없었기에 주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다. 이 모습을 불쌍히 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인간이 죄를 지어 얻은 부끄러움을 하느님께서 친히 이들에게 옷을 입히심으로써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시고, 당신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가죽은 동물의 희생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동물의 피 흘림으로 마련된 가죽옷으로만 비로소 인간이 지은 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태어난 지 1년 정도의 어린 양을 제단에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구하는 제사를 드렸다. 그들 모두가 제단에서 흘린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죄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친히 완전한 속죄와 죄 사함의 희생 제물을 마련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메시아, 하느님의 어린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시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라고 증언한다. 구약에서 예언된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희생 제물,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장차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실 것에 대한 증언인 셈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주어진 죄 사함을 얻기 위해 먼저 죄를 떠나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께 돌아왔다는 표시로서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의 세례는 큰 죄를 지은 유다인이 공동체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이방인들이 유다교로 개종할 때 받는 죄인들을 위한 정결례였기에 일반 유다인들은 거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 자신들은 죄로 인한 해당 사항이 없다는 이유로 요한의 세례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앞에 누구도 죄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들도 이방인들과 똑같이 회개하고 그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 요구한다.
이에 바오로는 “우리가 유다인 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 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 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라 하면서 누구나 주님의 세례를 받는 것이 유일한 죄 사함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의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도록 어린양으로 희생되었다. 당신은 죄가 없었지만, 죄인들을 위한 세례를 스스로 받으심으로 우리도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희생되셨음을 믿는 사람,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죄 사함 얻음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입게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양이시다. 물론 예수님은 양이 아닌 사람이시며 나아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자기를 믿는 이들에게 자신을 먹임으로써 그들을 살리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소유물, 능력 또는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남김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자기를 버리는 십자가의 삶을 수반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온 인류의 죄를 없애시는 대속적 죽음으로 여김으로 예수님을 신약의 "해방절 양"으로 상징하여 선포된다. 이 말씀은 고통 받는 "야훼의 종" (이사야 52:13-53:12)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남의 죄를 대신해 죽임을 당하며,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을 신약의 어린 양에 빗대어 증언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침묵하듯, 대신 희생당하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종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음을 말하고 있다. 탈출 12장의 제물이 된 양 역시 그렇다. 자신은 죽어 갔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파스카의 양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요한은 말한다. 따라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통해 죄로부터 해방 되었고, 죄 없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하고 머물러 있음으로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한 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우리의 파스카 양”(1코린 5,7) 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희생만 가득한 대속물이 횡행하는 세상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백성의 회개뿐 아니라 당신과 세상의 만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게 보여주신 삶은 사랑 그 자체였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앞에서 죄인일지라도 주눅 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기시 때문이다. 하느님은 보복하시거나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적어도 성경을 통해 우리게 보여주신 예수님은 살리시고 고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꺼버리지 않는 분이시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 되도다. 매 미사 때 마다 울려지는 거룩한 선포다. 우리게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초대 받음 자체도 복되지만, 그 거룩함을 먹고 마시는 우리는 이 얼마나 복된 자들일까?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 받고 잘못이 덮인 이! (시편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