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연중 제 23 주일
학설에 의하면 10만 년 전 이 지구상에는 최소 6 종류의 인간 부류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현재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만이 존재하게 되는데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다른 종에 비해 유일하게 뒷담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것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감소 시키고 긍정적인 호르몬의 수치를 높여준다. 뒷담화를 좋아하는가? 뒷담화라는 것은 앞에서는 말 못 하면서 나중에 뒤에서 비판하고 욕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수다를 의미하는데, 잘못된 행동이지만, 이런 뒷담화 안에도 소통과 친교 그리고 대화라는 창의적이고 긍정적 기능도 있다고 한다. 네 형제가 너희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외면? 소외? 혹은 뒷담화 하면서 비난?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말씀이다. 마태오 복음에 수록된 다섯 가지 설교 가운데 네 번째인 18장은 공동체의 설교를 담고 있다. 평화로워야할 신앙공동체 안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겠지만, 이런 선과 악의 문제는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큰 위협이 된다. (13장 가라지의 비유 참조) 사람이 모든 곳에서는 늘 갈등과 긴장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마태오는 교회 공동체 역시 같은 상황임을 말하고 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옆 사람한테 마음 쓰지 않는 개인주의자들이 넘쳐나는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라 할 수 없다. 오늘 말씀은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을 다룬다. 교회가 공동체 내의 악을 제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형제자매를 잃어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 단계에 이르는 형제적 교정(1618절)과 공동체기도(1920절)를 교회 공동체의 규범으로 제시한다. ‘되찾은 양의 비유’(18, 1214)와 ‘형제의 죄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 2122)는 말씀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공동체와 화해시킬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18,15). 형제에게 충고하는 것은 유다교의 오랜 전통에 의거한 것이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구성원 누구 하나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오류에 빠진 형제를 회개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마도 이 구절에서 형제가 저지른 죄란 공동체 생활을 방해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 대상이 나라면 내가 그 형제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어떤 이의 잘못을 지적해 줄 책임이 나에게 있기에 남들 이목을 피하여 단 둘이 해결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훈계조의 말과 지적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5). 그와 나 사이에 관계가 회복된다면 나는 그를 되찾는 것이고, 그는 공동체의 친교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형제에게 충고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와 대화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16). 신명기의 가르침대로 둘 또는 셋이 다시 함께 대화한다.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잘못과 관련하여, 그의 어떤 죄나 잘못이든지,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된다.”(신명 19,15) 주변에 도움을 청해 개인적 견해가 아니었음을 다른 형제들의 도움으로 설득해야 한다. 증인들은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하지만, 여럿이서 한 사람을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 그래도 그가 마음을 닫고 다른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에 공동체에게 알린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17) 이젠 공동체가 그를 책임져야 한다. 오로지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불행하게도 의도적으로 형제나 자매를 괴롭히고 공동체를 등지고자 한다면 방법이 없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 온 공동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 해보지만, 도무지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맡긴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에까지 확장 시킨다. 교회는 잃은 양을 찾는 착한 목자의 표징이다. 교회 공동체는 잃어버린 형제자매의 회개와 귀향의 은총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한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용서하고 보류하는 권한은 기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만 올바르게 발휘될 수 있다.
교회도 사랑들의 공동체다. 완덕을 향한 여정에 있는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완전하지 못함으로 공동체에 아픔을 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입으로 이웃에게 형제적 충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들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서 1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