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전거 타기
얼마 전 부터 운동삼아 자전거 타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전거에 일단 올라타면 페달을 밟아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자전거를 한 자리에 세워 놓고 타는 것은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묘기지 자전거 타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자전거 타기와 같지 않을 까요? 해서 힘이 들면 넘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다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신앙의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 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마태 11,20-24 참조)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꾸짖음 뒤에 바로 이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신랄한 독설을 퍼부으신 도시 코라진과 베사이다,……. 예수님께서 많이 찾아 가시고 기적도 많이 베푸신 곳인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도 거절합니다. 부유하기에 필요한 것이 없었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초대는 또 다른 짐이였겠지요.
오늘 제 1독서에서 즈카르야 예언자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이 바로 만민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라고 선포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면서 겸손하게 타고 오셨던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떠올리게 합니다.(마태 21,1-11; 마르 11,1-11; 참조) 이렇게 겸손하신 주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지식과 권위, 부유한 마음 때문에 코라진과 벳사이다처럼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불행을 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살아갈 때, 하느님은 우리의 작은 노력을 통해서 큰일을 이루십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
우리는 누구입니까? 가난한 철부지들입니까? 부유하고 지혜로운 이들입니까? 세상은 지혜를 가르치고 부유를 살도록 유혹하지만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삶은 가난한 철부지의 삶이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 신앙 안에서 가진 것이 없고, 신앙이 절박하여 하느님의 도우심을 온 마음으로 빌 줄 아는 이들이 철부지들입니다. 얼마를 가져야 부유한 사람이고 얼마가 없어야 가난한 사람인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얼마나 하느님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지 부터 짚어봐야 합니다. 신앙의 부유는 신앙 안에서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신앙의 자전거를 쉽게 탈 수 있는데 어려운 묘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큰 기쁨과 위안이 되어야지 비웃음으로 넘겨지는 말씀이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영을 따라 사는" 삶과 "육체의 영을 따라 사는" 삶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성령)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시면서, "육에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 (로마 8, 13) 이라 하십니다. 사람의 영은 죄 때문에 죽음을 뜻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로 창조된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적 힘에 순응하는 우리들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는 이기적 욕망에 사는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신앙의 자전거 타기는 쉽지 않은 듯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 커다란 걱정 보따리 하나 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걱정거리가 해결되면 걱정거리가 없어져야 할 텐데 그전엔 걱정도 안 되던 문제가 슬며시 내 등위에 얹혀 또 다른 걱정보따리가 되어집니다. 마치 걱정하고 살기로 작정한 듯 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하시며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처럼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뒤따르는 말씀이 좀 야릇합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무거운 짐을 내려 놓아야 되는데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십니다.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자면 당대의 유다인들은 613가지나 되는 무거운 율법계율을 "짐진" 까닭에 예수님의 가벼운 "내 짐"을 지우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가벼운 이유는 613개의 계율을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황금률과 사랑의 이중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마태22,34-40)으로 환원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다 해결되어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배워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짐꾼이 됨으로써 육신의 영의 노예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말씀입니다.
아픈 다리로 자전거 타기가 쉽지 않습니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 신앙의 자전거를 타는 것도 쉽지 않은 듯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겸손을 배우면, 의외로 쉬운 일이 되기도 합니다. 겸손은 잘하는 것을 못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을 잘한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용기 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것은 인간의 영인 내 의지와 내 뜻 그리고 내 욕심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멍에를 메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그분의 사랑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철부지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 김 두진(바오로)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