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아라!

 

 

 

 

 

성령을 받아라!

 

 

성령을 우리게 매우 친숙한 단어이지만,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바치는 성호경에서 우리는 성령을 부르지만, 그분을 잘 모릅니다. 성서에서 성령이 누구신지 언급하지만 이해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약속한대로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내린 사건(사도 2:1)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유태인들의 종교적 3대 축제일의 하나인 오순절과 같은 날입니다. 오순절은 본래 밀을 추수하여 그 첫 결실을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제를 지내는 축제였습니다(민수 28:26). 이날은 유월절 후 7주간(50일) 만에 지내기로 되어 있었으며 후에는 시나이산의 사건과 연관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느님과 맺은 계약(출애 19)을 기념하는 축일로 지냈습니다. 이러한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시어 예수님의 부활 축일이 구약의 유월절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듯 성령강림도 구약의 오순절과 깊은 관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 이후 만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활동이 시작되었으므로 이날은 교회의 탄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날은 예수성탄 대축일과 부활 대축일과 함께 구세사의 절정을 이루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축일은 전야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데, 전야미사 중에 부활전야 미사에서 영세한 신자들을 특별히 기억하게 됩니다. 이는 세례성사가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이어 ‘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한테 일어난 사건에 관해서 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한테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었습니다.(20,19ㄱ) 무엇이 제자들을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놓은 채 어두움에 머물게 했을까요? 인간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라고 가만히 두겠느냐는 불안감이 문을 꼭꼭 잠그고 두려움에 떨게 했을 것입니다. 그 어두움은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지만(14,27; 16,33) 그들의 꼭꼭 닫힌 마음에는 평화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잠긴 문을 그대로 여과하듯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들의 나약함과 부족한 믿음 두려움을 넘어 그들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십니다.(20,19)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실 때, 비로소 그들의 ‘어둠과 닫혔던 마음’이 평화로 넘치며 기뻐합니다.(20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셨지만 부활하여 살아 계신 분이시라는 확신은 제자들의 어둠을 기쁨의 빛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한테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것 입니다.(14,18­19; 16,20­24 참조)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명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20,21-23)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는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평화’와 함께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숨을 통하여 제자들한테 성령을 불어넣으시는 주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창세 2,7; 에제 37,9­10 참조)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이 지니게 될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서 일차적으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를 거룩하게 정화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용서하여라. 하느님의 숨이신 성령을 받으면 사제만 고해 성사실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표시로 우리 모두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실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불안감 아닐까요? 나만 손해 보면 어쩌지? 나만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면 어쩌지? 나만 욕먹는 것 같아 어쩌지? 용서는 마음이 같아지는 것이란 뜻의 한자어입니다. 같을 여如 와 마음 心 이 합쳐진 단어가 용서할 서 (恕) 입니다. 사랑의 마음이라면 용서가 가능해 집니다. 아니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지니고 있다면, 두려움과 어두움을 걷어내고 꼭꼭 닫힌 문을 열어내어 용서가 가능해 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오순절에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자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사도 2,1-11 참조) 이상한 언어를 알아듣는 것은 또 다른 은사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알아들으면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심령기도가 아무런 뜻도 없고, 간절한 지향도 없이 소리만 내고 있다면 심령기도가 아닌 것처럼 간절함을 아는 사람은 그 간절함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격과 업적을 체험하는 것 역시 성령의 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은 예수님의 강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함께하셨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같은 성령이십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 모두를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이끌어주는 분이십니다.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위대한 능력도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은 메마른 사막이 옥토로 바뀌는 것처럼 한 인간의 존재를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주님 도움 없으시면 저희 삶의 그 모든 것 해로운 것'뿐이라는 성령송가처럼 성령을 뺀 신앙은 울리는 징처럼 소리만 클 뿐 실속이 없습니다. 이런 성령과 함께 하려면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성령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기도, 묵상, 성체조배, 미사와 같은 교회의 모든

신앙 행위를 안에서 성령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 김 두진(바오로)신부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