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야 알게 되는 삼위일체

 

 

 

 

 

 

믿어야 알게 되는 삼위일체

 

 

신비란 일이나 현상 따위가 이성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한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신비로운 것이 많고 또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신비로우신 존재라는 것은 우리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머리로 온전히 이해되어지는 하느님이라면 그 하느님은 우리가 지어낸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신비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알아서 믿게 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믿어야 알게 되는 관계가 신앙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세분이 나뉨이 없으시며 높고 낮음도 없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그러나 한분이시라는 것은 말로도, 생각으로도 설명할 수도 설명되지도 않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게 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은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 16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이 세상을 당신의 아들을 통해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내용을 주제로 합니다. 이 주제는 요한복음서의 핵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먼저 첫 단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 말합니다. 사랑을 받는 분이 아니라 사랑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 아들의 구원사명이라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사건과 연결되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주도권은 아들의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1요한 4, 9)  요한복음서 전체에 걸쳐 하느님은 사랑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 19)  하느님이 주도권을 취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4, 8) 

 

하느님이 그토록 사랑하신 것은 ‘세상’ 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세상’은 인간들의 세계, 곧 인류뿐 아니라 창조된 우주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1, 3. 9. 10; 3, 19 참조)  요한의 관점에 따르면, 세상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세상은 악한 것, 악의 우두머리가 지배하는 곳이 됩니다. (12, 46 – 48; 16, 8 – 9 참조)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활동이 더 전개됨에 따라 ‘세상’ 이라는 용어는 적대적인 어조를 띠게 되고, 대부분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사탄의 인도를 따라간 사람들을 가리키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보편적이지만 이 보편성은 개개인의 응답에 따라 결정되어집니다. ‘사랑하다’ 또는 ‘사랑’ 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서의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용어들은 13–17장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비록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의 외아들을 내어줄 정도입니다.  ‘내주다’ 라는 말은 하느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 곧 육화와 동시에 십자가에 대한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주다’ 라는 말이 14 – 15절의 ‘들어 올리다’ 라는 말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요한이 단지 외아들의 육화만을 생각했다면, ‘내주다’ 라는 동사 대신 ‘보내다’ 라는 동사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내주다’ 라는 말을 선택한 것은 예수님의 희생 또는 대가를 치르는 봉헌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렇게까지 내어준 외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자율적인’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모든 생명의 원천에서 떨어져 나가기에 파멸이요 죽음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심판의 형벌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삶에서 하느님 앞에서 한 개인이 갖는 책임과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신의 내면에서 말하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사가는 아드님이 바로 빛이고, 심판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그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들려줍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창세기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빛과 어둠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게 됩니다. 빛은 분명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지만 어둠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시자 어둠과 그림자는 빛에 종속되어 따라온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빛과 어둠을 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다만 빛이었는데, 빛 반대편에 서면 어둠에 속해집니다.

 

오늘 제1독서는 '금송아지 사건'(탈출 32,1-6 참조) 즉,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두 증언판을 깨뜨려 버린 후,(탈출 32,15-20 참조) 하느님께 다시 새 증언판을 받으러 가서 바친 청원기도입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모세는 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들도 너무 자주 하느님 앞에서조차 '목에 힘을 주고' 사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설명해 보자면 우리의 뻣뻣함은 세상, 어둠, 심판 즉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의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믿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로움의 극치인 삼위일체 대축일에 우리는 엎드려 그분을 경배해야 합니다. 아니 빛에 속해있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구원 받은 사람답게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야외미사를 통해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숨결과 십자가에 기꺼이 당신 자신을 바치신 성자의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숨결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성령의 현존 안에서 온 마음으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경배합시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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