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을 시작하는 성지주일에……

 

 

 

 

 

성주간을 시작하는 성지주일에…..

 

 

성지주일입니다. 늘 성지주일이 되면 두 가지의 질문이 가슴에 남습니다. 길가에 옷을 깔고 저토록 환호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급반전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고래고래 소리 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예수님의 끔찍스런 고통 중에 있는 하느님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두 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유다 최고 회의의 심문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인데, 유다 최고 회의는 로마 제 국이

허락한 자치 기구였습니다. 지방 유지인 원로들과, 대사제와 중견 사제들, 그리고 율사 대표들로 구성되어, 전체 71명으로 구성된 의결 기관입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선고를 내리지만 유다 최고회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권한이 없기에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게 합니다.

 

최고 회의가 그분에게 내린 거짓 예언자라는 죄명은 빌라도의 관심 밖의 문제인지라 최고위회는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둔갑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의 왕으로 행세하였다고 그들의 합의를 뒤집습니다. 이런 기회를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적절히 사용하는데, 총독 관저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에게 예수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게 한 다음, 그 앞에 경례하며 ‘유대인의 왕 만세.’ 라고 외치게 합니다. 식민지에서 왕으로 자처한 인물이 점령군 군사들로부터 받는 조롱인데, 식민지 백성들 전체를 우롱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유다 지도자들과는 생각이 달랐고, 가르침도 달랐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엄하게 벌하신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면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병고, 가난, 실패 등을 모두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 믿게 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분이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고, 소외시킨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 다. 하느님께서 죄인도 사랑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르친 것과는 반대의 것으로 그들을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유다 사회 실세들의 눈에 예수님은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시골 목수의 아들이고, 종교적 신분도 평신도였으며, 재산도, 지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마르 2,27)고 공언하셨고,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존경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 면전에서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간다.”(마태 21,31)고 그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과 더불어 누려온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골치 아픈 인물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대사제 가야파의 말을 전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자기들의 주장과 법이 온 세상을 구한다고 믿는 이들이 만드는 스스로의 구덩이입니다. 사실은 자기들이 만든 질서와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자는 것에 불과한 것임에도……..

 

예수님은 그렇게 그들에게서 제거되셨습니다. 유다 최고회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적대시하던 로마 총독의 협조까지 얻어냈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로마제국을 거슬려 음모한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편법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친구를 제거하기 위해 멀리 있는 원수의 협조를 얻는 속임수 즉, 이이제이 (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 지혜롭게까지 생각 되어지는 그들의 이런 편법은 미움으로 가득찬 그들의 어둠이 그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증오에 모아져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수난 복음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반하는 베드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알몸으로 도망가는 제자, 이리저리 흔들리는 쉽게 마음이 변하는 군중,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대사제,  그리고 멀찍이서 바라보던 여인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내게 피해가 온다 싶고, 더 큰 즐거움이 온다면 기꺼이 신앙은 고 백성사의 뒤편으로 밀어놓은채 십자가를 버립니다. 우리들 또한 십자가, 희생, 겸손, 사랑이라는 길이 있지만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허상을 쫓아 살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의 절규, 아파하는 이웃의 고통을 모른체 할 때가 많습니다.

 

거룩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성 목요일 우리를 위해 만찬을 준비하시고 발을 닦아 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서로 사랑하라시던 그분의 거룩한 유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도록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려진 그분을 찬송하는 성 금요일에 우리의 십자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거룩한 부활 성야에 그분의 영광을 만나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실천은 무엇일까요? 환호가 변덕스럽게 저주로 변했던 군중의 마음과는 달리 아버지의 구원을 전하러 오신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 김 두진 바오로 신부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