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듯 쉽지 않은 길
효도란 무엇일까요? 세상에 효도를 몰라 효도하지 못하는 자녀들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효도는 알면서 하지 못하는, 쉬운 듯 쉽지 않은 길입니다. 돌이켜보면 영원히 살아계셔 저의 효도를 실컷 받으실 것 같던 저의 부모님들이 제 곁을 후딱 떠나시고 나니 늘 귓전에 맴도는 소리 "있을 때 잘해!"하는 핀잔 섞인 꾸중만 듣는 것 같아 죄송스러움이 큽니다. 같은 의미로, 신앙생활도 쉬운 듯, 쉽지 않은 것이 신앙의 길이 바로 소명의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소명을 따라 살다보면, 칭찬을 받을 때도 있지만, 비난도 그에 못지않게 듣게 됩니다. 그 소명의 길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오해와 반대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소명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과연’이라는 단어와 ‘정말’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반복하며 망설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 혹시나? 역시나? 늘 가슴에 바위하나 담고 가듯 버거움을 안고 갑니다.
오늘 1독서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소명 사화’를 듣습니다. 자신이 있기도 전에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존재와 삶을 성별하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불러 명하십니다.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1,7).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말해야 하는 소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손이 늘 안으로 굽듯, 자기 혀에 단것만 좋아하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것만 들으려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범인들에게 이 소명은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하고 때로는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기에 쉬운 듯,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략 3년 가까이 (27~30년) 공적으로 활약 하셨 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은 맹활약이긴 했어도 인정받기 보다는 불신이 더 많았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당원들 은 그분을 죽이기로 결정했고 친척들은 그분이 정신 나갔다고 했으며 백성뿐 아니라 제자들조차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고향사람들마저 그분을 배척합니다. 과연 시메온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 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 (루카2,34)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당신의 소명을 완성하십니다. 자신의 뜻대로 행하다가 받는 반대와 시기라면 그 힘겨움이 덜하겠지만, 소명으로서 주어진 ‘그 길’에 서 받게 되는 반대와 시기는 견디기 힘들고 두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소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실 수 있으셨을까 요? 내 팔자, 내 운명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오늘 2독서에서 소 명 안에서 어려움을 이겨낸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1코린 13,4). 그렇습니다! 사랑 안 에 소명을 살아낼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아무런 일도 하실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루가라 불리는 그는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의 배척 이야기를 실으면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불어 주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그리스도교의 신도들은 모두가 유다인 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동족인 유대인을 상대로 전도했지만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와 사도 바오로의 회심을 계기로 이방인들을 상대로 한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방인들이 오히려 더 잘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 바탕을 두고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두 가지의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려는 소명으로서의 삶입니다. 누가 노래한 것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랑받고 있는 사람답게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려는 것은 우리가 미사 때마다 듣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 하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살아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모에게 사랑 받은 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기억하여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것이 효도이며 그 효도는 사랑일 수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두 번째로는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목수의 아들로만 기억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나자렛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자란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청년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처럼 속된 사람들의 눈엔 구원자 예수님에게서도 그저 동네 이웃의 아들만 보일 뿐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런 배타적인 행동을 보시고“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4,24)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발길을 돌리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저를 "수사님이셨을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합 니다. 좋은 뜻으로 알아듣습니다만, 이 말을 들을 때 마다 “저 사 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던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의 이야 기가 떠오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양 단정하고 한 이웃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편견은 예수님을 벼랑으로 밀어내는 마음입 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랑, 성을 내지 않는 인내, 앙심을 품지 않 는 선의, 우리가 지녀야 할 것들이라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 또한 쉬운 듯 쉽지 않은 것이긴 해도 우리 소명의 길인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