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희를 괴롭히는 죄를 물리치시어,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들게 하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소서!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이젠 바람에 봄기운이 실려 추위로 움츠렸던 몸을 기지개 켜게 합니다. 여러분
모두 백신을 맞아 좀더 안전한 생활을 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백신이 100%
예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95-98%를 예방한다고 하니 맞으실 수 있는 분들은 꼭 맞으시기
바랍니다. 얼른 모두를 뵙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일 년이
넘게 잘 참아왔는데 싶어 다시한번 보고싶은 마음을 꾹 내려 참습니다.
어제 용서라는
단어가 마음에 깊이 다가와 용서를 안고 묵상했습니다. 용서(Forgiving)는
주는(giving)것이 라는 생각에 머물며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일곱은 완전수로, 실제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 가가 아니라 ‘완전히 그리고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용서(forgiving)란
단어가 주는 것(for-giving)으로 읽히며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그렇습니다. Forgiving! 용서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해서 용서라는 단어 대신 준다는 말로 바꿔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주님
제가 형제에게 몇 번을 주어야 하는 겁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히 주는 겁니까?” 이렇게 말을 바꾸고 보니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주는 것은 조건이
없어야 하는데 돌려받을 것을 계산해서 주었으니 결국 장사꾼의 얄팍한 계산 속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주고받으며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를 숱하게 생각해내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애써왔는데 여태껏 실제로는 그렇게 살았구나 하는
자책이 밀려와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는 이유가 보입니다. 설사 내가 한 행동 중에 좋은 마음으로 하고 또 베푼 것이 있다면 그건 내가 그들에게 이미 거저로 해 준
것이어야 합니다. 돌려받기를 생각하고 준 것이라면 준 것이 아닌데, 나는
주었다고 생각했고 준 것만큼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니
모든 탓이 남에게 돌아가고, 나만큼만 해봐라 하는 쓸데없는 자부심에 남보다 위에 서있으려는 자만심까지
커져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 가슴에 남을 답답함과 상처는 당연한 것이겠지요. 사랑하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돌려받을 계산 없이 줄 때 주어지는 것이 기쁨이고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심은 세상을 향한, 우리 모두를 향한
용서였습니다. 이번 주일 복음은 요한 복음으로 “모세가 광여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말씀이 들려집니다. 예수님이 들려 올려진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을 용서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를 용서하기
위한 자기 비움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심은 결국 사랑이고, 용서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내어 주심을 기억하면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다면 광야에 높이 올려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살아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용서는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도 아무 조건 없이 내어 놓는 십자가입니다. 거룩한 사순 시기 동안 서로에게 내어주는 삶을 통해 십자가의 그분을 기억하고 또 부활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 평안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