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올 겨울은 얼마나 추울지, 눈은
얼마나 올지 미리 걱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때쯤 이면 같은 동네에서 친한 아줌마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며 김장을 담그는 일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배춧잎을 숭숭 썰어 동태국을 끓여 먹으며 “올 배추는 참 실하네, 무가 참 다네” 하시며 김치를 담가 김칫독에 꼭꼭 채우며 떠들썩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의 벅적거림이 생각난다. 우리가 김장을 담그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맛있는 김치 하나면 겨울을 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겠다. 지금은 이런 축제(?) 같은 떠들썩함이
없어져 섭섭한 생각도 들지만, 추운 겨울에 김치로 만든 음식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저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이제 김장도 끝냈으니,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끄떡없겠네.”시던 호기어린 말씀도
기억이 난다. 김장은 겨울을 준비하며 긴 겨울을 날 준비를 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오늘 연중 32주일의 말씀에서 우리가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면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을 옳게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싶다. 단지 이해의 크기가 달라 서로의 고집스러움이
세상을 힘들게 한다. 그래도 세상에는 옳게 사는 이들이 많아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바리사이들과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다. 오늘 복음
말씀 전에 마르코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 과의 논쟁과 대담 (마르코
11,27-12,37)을 소개한 다음 그 결론의 말씀으로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훈시와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시는 상황을 전한다. 여기에서 율법학자들은 거짓 신앙의 표본이 되고 가난한 과부는 참 신앙인의
귀감이 된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누구나 축일에 두루마기 비슷한 것을 입었다. 그런데 율사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예복은 훨씬 더 길었다. 또한 남자들은 트필린이라는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고 다녔는데, 이 안에 신명기 말씀의 말씀 즉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는 글이 있었다. 또한 집 앞 문설주에도 이것(메주자)를 달아 놓는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남들보다 성구갑도 큼직하게 달고 옷단 술도 기다랗게 만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율사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선생님 혹은 아버지 (압바, 압히)라고 부르며 인사를 했다.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가르치고, 율사가 잔칫집에 오면 그 집 주인은 영광스럽게 여겨 늘 윗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마치 본당신부의 모습 같아 부끄러워진다. 남과 다른 복장을
하고 인사 받고, 늘 윗자리에 앉게 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아들어야 한 것은 바리사이들의 행위나 드러냄 보다 가난한 과부의 행위다. 예수님이 돈의 가치를 환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돈의 가치를 너무 정확하게 환산한 예수님의 계산법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있다. 과부가 넣은 렙톤 두 닢은 우리가 사용하는 동전인 쿼터(Quarter) 정도 되는 돈이다. 한 데라리온이 하루의 품삯이었고
한 랩톤은 128분의 1 데나리온이었으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액수가 아니라 관대한 마음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가 하는 문제는 돈의 액수를 정하지 않는다.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가는 시간의 많고 적음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 1독서의 열왕기 말씀, 굶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과 먹으려고 남겨 두었던 밀가루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의 처분만 바라자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올바른 마음으로
신앙의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과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관대했던 가난한 과부의 밀가루 단지는 비워지지 않았고 기름병도 마르지 않았다고 제 1독서는 전한다. 우리의 계산법과 하느님의 계산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가 행하는 신앙의 행위는 바로 이런 관대한 정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참 행복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잘 보이고
남에게 멋있게 보이는 것이 구원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관대함을 배우고 기쁨을 살아내는 것은 구원을 살아내는 것과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
김장을 충분히 담갔다고 겨울을 편히 지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과 명예를 받는 것이 하늘나라에서의 큰 기쁨과 비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배운 관대함을 실천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참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인생의 겨울인 죽음을 준비하고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받을 자격을 갖춘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