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값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적잖이 놀랐던 것은 신자들 안에 동성동본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민감한
질문이 될 것 같아 묻지도 못하고 의아해 하다가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혼자 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여성이 결혼을 하면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불린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하신 분들의 이름을 부르면 많은 경우에 당황해 하신다. 오래 전에 내 이름도 변했다.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 대신 수사님 혹은 신부님으로 불린다. 김
아무개가 김 사장 혹은 김 회장으로 불리는 것처럼 자기 이름보다 직책이 더 중요한 듯하다.
오늘
제 1독서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Yahweh)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야훼’ 대신 아도나이(Adonai) 또는 엘로힘(Elohim) 이라는 호칭을 썼고, 이 때문에 야훼는
자음자 YHWH로
표기하게 되었다. 2008년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거룩한
네 글자 (YHWH) 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이름을
전례에서 사용 하거나 발음하지 말고 주님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지침을 발표했다. 그 이유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주교 용어 자료집)
야훼는
존재하다 (hawah 또는 hayah)라는 동사의 제 일인칭의 형태로서 “나는 존재
한다“로 설명될 수 있다. 또 인간의 입장에서 2인칭을 써서 “그분은 존재 한다” 혹은 “그분은 다른 것들이 존재하도록 하시는 분이시다“로
설명된다. 즉 그분께서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도록 하시는 분이시기에 주인이시다. 신앙이란 이런 주인께 가난한 이들(Anawim)이 필요한 것들을 빌어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나윔(Anawim)에
대한 설명을 사전을 통해 보면, 구약 성서에서는 궁핍한 자, 가련한
자, 억눌린 자, 핍박 받는 자들을 지칭한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은 무엇보다 정신적 성향이나 마음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가난이 지니는 한계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즉, 가난이 우리의 한계이긴 하지만 이 가난을
통해 얻어지는 부유함이 신앙이란 것이다. 신약성경은 가난한 자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특권이 있다고
한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약시대의 하느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두 똑같이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셨지만, 우상숭배 등 죄악을 저지름으로 하느님의 벌을 받아 광야에서 죽어야 했음을 본보기로 삼으라 한다. 우리들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산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해피 앤딩(Happy
Ending)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 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 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오늘의
복음말씀을 잘 들어보면,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상급을 주신다는 약속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현세적 징벌을 내리신다고도 하지 않으신다. 사실
회개하지 않아도 현실의 삶에서 잘 살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하는 사건 사고가 회개하지
않아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시고 나서 비유를 들어 하시는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다. 그 와중에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잘라버리겠다는 주인의 뜻과는
달리 포도 재배인은 일 년의 회개 시간을 더 벌게 된다. 하느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매정하게
잘라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구원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사랑의 주인이심을 말하고 있다.
사실 회개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사도직의 첫 선포였다.
사도
바울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뵙고 회개 하는데 바울로의 이 회심이 단순히 죄에서 돌아서는 개념 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사울은 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율법에
대한 열성과 흠 없음을 간직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유익함과 자랑스러움을 포기한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된 참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세상의 유익하고 자랑할 만한 것들은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해서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여태까지의 삶을 버린 것이 바오로 사도의 회개요 회심 이었다. 강도 짓 하던
사형수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회개다. 바오로의 회개는 삶과 가치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그에게 회개는 깨달음과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회개는 죄에서
돌아서는 것(metanoeo) 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변해야 (epistrepho) 산다는
지난주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들려준 무화과나무의 열매 맺지 못함과 회개에 대한 말씀은 단순히 죄 짓지 말고 회개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경우처럼 열매를 맺기 위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신앙은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시는 분에게 가난한 이들(Anawim)이 빌어 얻는 것이라 말씀드렸다.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을 공짜로 얻어지는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회개는 우리 이름(Anawim)
값을 하자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어떨까 싶다. 우리는Christian (신앙인)이기에 Anawim
(아나윔)이어야 한다. 이름 값 하는
우리였으면 한다. 변해야 살기 때문이다.